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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단원으로 의열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일찍이 상경하여 경신학교(儆新學校)를 졸업하고 귀향하여 청주 청남학교(靑南學校) 교사로 재직한 바 있다. 일제 강점기 내내 독립운동에 헌신하였고, 해외로 망명하였다가 광복 후 귀국, 사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1909년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의 당원이 되어 국내외에서 독립을 위한 지하공작을 전개하였고, 1919년 3·1운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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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18세에 동학교도가 되고, 1894년(고종 31)의 동학혁명 때 손병희(孫秉熙)[1861~1922]와 함께 6만 여명의 교도를 이끌고 호응했으나 관군에 의하여 진압당한 후 전국 각처를 방랑하였다. 1908년 천도교에 입교하여 전제관장(典制觀長) 등을 역임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만세운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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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성환(金成煥)[1875~1985]은 1875년 10월 17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이목리에서 태어나 옆 마을인 문박리에 서당을 세워 생도들에게 한학 등을 가르쳤다. 1910년 8월 한일 병합 조약[경술국치]이 강제로 체결되어 국권을 상실하자 분노하며 부당성을 주장하였고, 이후 형 김제환(金濟煥)[1867~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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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민족혁명당 당원으로 상해와 남경 등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1930년부터 중국 상해·남경 등지를 다니면서 신익희(申翼熙)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민족혁명당의 당원으로 가입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민족혁명당은 1932년 1월 일본이 상해 침략을 시작으로 중국 본토 침략을 본격화하자 급변하는 객관적 정세에 비추어 독립운동 세력의 총집결을 절감하고 통합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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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1919년 4월 8일의 상주군 화북면 문장산(文藏山)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화북면 장암동(壯岩洞) 구장인 이성범(李聖範)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기로 결의하고, 4월 4일 인근 지역에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권유하는 권고문을 보내는 한편,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거사일인 4월 8일 오후 2시경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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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때 청주와 인근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 만세시위를 일으키게 한 독립운동가. 『매일신보(每日申報)』 판매업을 하고 있던 그는 1919년 3월 1일 광무황제의 국장(國葬)에 참례키 위해 상경했을 때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는 것을 보고, 귀향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귀가 후 강내면(江內面)에서 매일 산 위에서 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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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정환(金貞煥)[1895~1964]은 1895년 9월 16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신기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하자 김정환은 북이면사무소에서 같이 서기로 근무하고 있던 김호상(金浩相)·이시우(李始雨)·장성이(張星伊)와 함께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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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단식, 순절한 애국지사. 청주 지방의 유생으로서 교육구국운동을 펼치는 한편, 평소 배일의식이 강하여 일제의 호적 기입을 거부하고, 이른바 ‘경절’에 일장기를 달지 않았으며 납세와 부역 등을 거부하는 등 항일투쟁을 하였다. 그러던 1913년 2월 일본 헌병에 피체되었으나 단식투쟁으로 동년 3월에 풀려났다. 그러나 곧 이어 5월 청원군 오창면(梧倉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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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찬호(金燦鎬)[1908~1959]는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구방리에서 태어났다. 청주공립농업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30년 1월 21일 광주학생운동 동조 시위가 청주에서도 전개되었다. 1930년 1월 21일 조례가 끝나자마자 청주공립농업학교 및 청주고등보통학교에서 학생 수백 명이 거리로 뛰쳐나와 대한 독립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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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의병. 김천복(金千福)[1881~?]은 1881년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팔봉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 7월 24일, 제3차 한일협약과 함께 조인된 비밀 각서에 따라 군대가 해산되었다. 대한제국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은 군대 해산 명령을 따르지 않고 “군인으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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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방의 항일투쟁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일찍이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4년에 청주에 청남학교(淸南學校)를 설립하고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안희제(安熙濟)·김동삼(金東三)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신민회(新民會) 계열의 비밀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창립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 후 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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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청원군 북이면 면사무소 서기로 재직하던 중 1919년 3월 1일이래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지는 것에 자극을 받아 고향에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심하였다. 1919년 4월 1일 밤 8시경, 자신이 거주하고 있던 북이면 신기리 주민을 규합하여 근처 신대리 앞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에 다수의 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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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흥배(金興培)[1901~1986]는 1901년 8월 15일 청주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9일 청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진행된 청주 3·1운동 모의에 참여하였다. 1919년 당시 경성 중앙학교 학생이었던 신영호(申鍈浩)는 1919년 3월 1일부터 3월 4일까지 경성에서 3·1운동을 목격하게 되었고, 조선의 독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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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남백우(南百祐)[?~?]는 충청북도 청주 출신으로 주로 부산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 10월 무렵 대동청년당(大同靑年黨) 결성에 가담하여 남형우(南亨祐)·안희제(安熙濟)·이원식(李元植) 등 80여 명과 함께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대동청년당은 신민회(新民會) 계열의 비밀 청년 단체로, 1945년 광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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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일원에서 항일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 일찍이 고향인 충청북도 청원에서 3·1운동에 참가한 뒤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6년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신민부(新民府)에 가담하여 항일활동을 벌이다가 1928년 2월 21일 중동선(中東線)이 통과하는 해림시(海林市)에서 남한송(南韓松)·서광수(徐光洙) 등의 동지들과 함께 모종의 중대 사명을 수행하던 중 일본과 중국 혼성 경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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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류필열(柳弼烈)[1905~1937]은 1905년 5월 24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도원리에서 태어났다. 삼승공립보통학교[현 보은 판동초등학교]에서 훈도(訓導)로 재직 중이던 1932년에 같은 학교 훈도이던 박인섭(朴仁燮)으로부터 신흥 교육 계통의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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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1909년경 동지들과 비밀결사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남대문 밖에 소의학교(昭義學校)를 세워 민족교육사업에 나섰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이른바 한성정부(漢城政府)의 성립과 국민대회(國民大會) 개최를 추진하였고, 자금 조달을 추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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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민금봉(閔今奉)[1912~1946]은 1912년 10월 18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양촌리에서 태어났다. 1930년 일제에 항거하다 체포될 당시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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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의병. 박덕여(朴德汝)[?~1908]는 청주 출신으로, 1907년부터 1908년까지 충청남도 청양과 공주 등지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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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 등을 통해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1920년 2월 16일 서울에서 김광제(金光濟) 등 동지와 함께 조선노동대회(朝鮮勞動大會)를 조직하고 간사로 활동하였다. 동회는 노동자의 상호부조와 인격 및 지적향상을 목적으로 한 계몽적 노동단체로서 주로 지식계몽에 주력하였다. 그는 또한 1920년 5월 31일 서울에서 다수의 동지들과 물산장려·상부상조·인권평등에 의한 세계평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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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의병. 박반문은 1851년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에서 태어났다. 1907년 9월부터 청주 및 목천[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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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봉래(朴鳳來)[1870~1954]는 1870년 2월 8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석판리]에서 태어났다. 경성에서 궁내부주사로 일하면서 권농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권농동]에 거주하였으며,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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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제1공립중학교 학생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1940년 3월 청주제1공립중학교에 재학 중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반대하여 신사참배와 궁성요배 등을 기피하기 위하여 동지들을 규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1942년 5월 5일 그가 개교기념일에 전교생이 와우산(臥牛山)으로 등산·행군하던 중에 일본의 패전을 뜻하는 노래를 부른 것이 청주 경찰서에 탐지되어 조사를 받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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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제우(朴齊宇)[1857~1930]는 1857년 5월 12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세교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1일 박제우는 다음 날인 4월 2일에 청주군 강서면[현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읍내 시장에서 독립 만세 시위가 있음을 알리는 통고문을 덕암리 김학술(金學術)에게 주어 마을 사람들에게 널리 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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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내 장터의 만세시위에 참가했던 독립운동가. 충청북도 청원군 출신으로 1919년 4월 1일 충청남도 천안의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조인원(趙仁元)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워놓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3천여 명이 운집한 아우내 장터는 대한독립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시위군중이 태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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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찬규(朴贊圭)[1928~2019]는 1928년 4월 5일 충청북도 청주군 부용면 부용리[현 세종특별자치시 부용면 부용리]에서 태어났다. 1945년 중국 북경(北京)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 제1972부대의 군속으로 근무하면서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차별 대우 및 일본군의 잔악한 행동을 보며 민족의식을 키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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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의병. 박치양(朴致良)[1878~?]은 1878년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계원리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1907년에는 군대를 강제 해산하는 등 일제의 국권 침탈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자 전국에서 항일 의병 항쟁이 거세게 일어났다. 박치양도 1908년 초 의병에 투신하여 충청북도 보은군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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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성진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에 재학 중이던 그는 1917년 3월 장일환(張日煥) 등 숭실학교 학생 및 기독교인들과 비밀결사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를 조직하여 서기 겸 통신원의 직책을 맡아 활동하였다. 동년 6월에는 노덕순(盧德淳) 등과 함께 식지(食指)를 잘라 ‘대한독립’이라 혈서(血書)하고 국민회의 단결과 장래의 활동방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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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백광필(白光弼)[1899~?]은 1899년 5월 2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화하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백광필은 조선 독립 문제에 관한 여론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고, 3월 말 최석인(崔碩寅)·류연화(柳淵和) 등과 함께 훈정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자신의 거처에서 조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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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변영봉(卞榮鳳)[1886~1952]은 1886년 12월 26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우산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청주에서도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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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독립운동가. 일제 강점기 청주지역에서 활동한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지방유지이다. 본관은 달성(達城)이며, 호는 양초(兩草)로 학유공(學諭公) 서도(徐渡)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3·1운동 때 지방 책임자로 활약한 서상갑(徐相甲)이며, 어머니는 반남박씨(潘南朴氏)이다. 부인은 파평윤씨(坡平尹氏)로 슬하에 1남을 두었다. 족보상에 나타난 서광준[1910~1944]의 이름은 서병준(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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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서정렬(徐正烈)[1882~1944]은 1882년 12월 24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미원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하자 청주 지역에서도 독립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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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성축용(成丑鏞)[1923~?]은 1923년 2월 5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부용외천리에서 태어났다. 1939년 대구사범학교 심상과에 입학하였으며,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1년 학내 항일 비밀 결사인 문예부에서 활동하여 퇴학 처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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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의 수장으로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천도교 교주. 1897년 해월 최시형(崔時亨)의 뒤를 이어 동학의 제3대 교주가 된 그는 동학의 재건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여의치 않자 일본으로 망명하여 교세의 재건에 힘쓰는 한편, 국내의 인재들을 일본으로 유학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교도들을 지휘하여 갑진개화운동(甲辰開化運動)이라는 신생활운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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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손재순(孫在順)[1886~?]은 1886년 4월 1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대리에서 태어났다. 중국으로 건너가 화룡현(和龍縣) 덕신사(德新社) 대후망봉(大後望峯)에 거주하였으며, 1920년 2월 간도에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가입하였다. 대한국민회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및 헌법 공포 이후 연길(延吉)·왕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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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송태현(宋台鉉)[1874~1945]은 1874년 3월 10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우산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청주에서도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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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의병. 송헌준(宋憲俊)[1884~?]은 1884년 청주에서 태어나 이발업에 종사하였다. 1907년 11월 18일 김형백(金亨伯)의 의진에 가담하여 항일 의병 항쟁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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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해외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1912년 4월 중국 항주의약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동제사(同濟社)와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23년 4월 중국군 중교(中校)로 항주군의학교 외과 주임에 임명된 이후 중국군으로 복무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1939년에는 중경(重慶)으로 이전한 임시의정원 제31회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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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원군 미원장터의 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30일 이용실(李容實)·이수란(李水蘭) 등과 함께 미원장터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부터 1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장터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자, 일본 헌병은 태극기를 빼앗으며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지휘하던 그를 주재소로 연행하여 감금시켰다. 이에 격분한 시위군중이 주재소로 몰려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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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신광균(申光均)[1883~?]은 1883년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지동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2일 청주군 강서면[현 청주시 흥덕구 강서동] 읍내 시장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할 목적으로 4월 1일 지동리 송재인(宋在寅)의 집에서 송재옥(宋在玉) 등과 함께 읍내 곳곳에 붙일 만세 시위 참여 촉구 문서 약 200매를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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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에 크게 기여한 독립운동가. 구한말 계몽운동을 펼치던 중 1905년 을사오조약을 강제 당하자, 이에 분개하여 자결을 기도, 그 여파로 오른쪽 눈을 실명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상해로 망명, 중국의 신해혁명에 참가하여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였다. 1912년 이후 동제사, 신한혁명당 등 각종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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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회복운동과 국내외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1907년 4월에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서울과 충청북도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에는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에, 1909년에는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 만주로 망명하여 봉천성 일대에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는데 노력하였고, 귀국 후 3·1운동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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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1907년 서울의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어 서울 수표교교회에서 재임하던 1919년 2월 중순경, 오화영(吳華英)으로부터 3·1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동참하기로 결심하였다. 이해 2월 28일, 그는 손병희(孫秉熙)[1861~1922]의 집에서 열린 민족대표의 최종 회합에 참여하였고,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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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신석범(申錫範)[1895~1949]은 1895년 5월 25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우산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청주에서도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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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신성휴(申聖休)[1891~1955]는 1891년 8월 16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하자 청주 지역에서도 독립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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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신순호(申順浩)[1922~2009]는 1922년 1월 22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에서 태어났다. 중국으로 망명한 아버지 신건식(申健植)을 만나기 위하여 어머니 오건해(吳健海)의 손에 이끌려 네 살 때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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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때 청주의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던 독립운동가. 1919년 당시 서울의 중앙학교(中央學校) 재학생으로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귀향하였다. 그는 3월 9일 청주농업학교(淸州農業學校) 기숙사로 가서 농업학교 학생들에게 서울의 독립만세운동 상황을 알렸다. 그리고 청주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벌이자고 제의하여 찬성을 얻어 「독립선언문」과 경고문 등을 제작하고 인쇄하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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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1943년 10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징집 당하여 중국 남경지구(南京地區)의 일본군 부대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그는 중국 중경(重慶)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1944년 5월 한국광복군에 입대할 것을 결심하고 일본군을 탈출한 후 우선 중국군 유격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이어 1945년 4월 중국 중경에 도착하여 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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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신정식(申鼎植)[1869~1942]은 1869년 9월 12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대신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하자 청주 지역에서도 독립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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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신창희(申昌喜)[1906~1990]는 1906년 2월 22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에서 태어났다. 1911년 아버지 신규식(申圭植)이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고, 1919년 9월 신규식의 부름을 받아 어머니 조정완(趙貞婉)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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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언론인·독립운동가·문인.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호는 일편단생(一片丹生), 단생(丹生) 혹은 단재(丹齋)이다. 1880년 12월 8일 충청남도 대덕군(大德郡) 산내면(지금의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필명은 금협산인(錦頰山人), 무애생(無涯生), 열혈생(熱血生), 한놈, 검심(劍心), 적심(赤心), 연시몽인(燕市夢人) 등이다. 조선시대 신숙주(申淑舟)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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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30일 미원장터에서 전개된 군내 최대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1시경 1천여 명의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때 일본 헌병이 출동하여 주도자를 강제로 주재소로 연행해가자 군중들과 주재소로 쇄도하여 투석전을 벌이는 등 격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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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독립을 청원한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자는 여종(汝宗), 호는 우석(友石)이다. 참봉 신현기(申鉉基)의 장남으로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서촌동 179번지[동촌로116번길 23]에서 출생하였다. 대사성을 지낸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 문하에서 다년간 수학하여 시문에 뛰어났다.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서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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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금을 모금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한 독립운동가. 1920년 음력 8월경 신흥구(申興求)·이종만(李鍾萬) 등과 함께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활동을 펴기로 결의하고 유영창(柳永昌)·한병호(韓秉浩) 등을 동지로 포섭하여 비밀결사 평양결사단 청주지부를 조직하였다. 이후 그는 동지들과 함께 모의권총을 소지하고 충청북도 일대를 중심으로 군자금 모금활동을 펴던 중 일경에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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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신형호(申衡浩)[1891~?]는 1891년 1월 14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에서 태어났다. 미국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1918년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시카고지방회 서기로 활동하였고, 1919년 회장을 역임하였다. 1919년 5월에는 디트로이트 지방회 설립을 위하여 디트로이트 임시 한인공동회 소속으로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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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35세 때에 청주북감리교회에서 미국인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1913년 서울의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로서 공주에서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1917년 평양남산현교회(平壤南山峴敎會) 목사로 옮겨 재임하던 1919년 2월, 동지의 규합을 위해 평양에 온 이승훈(李昇薰)으로부터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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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장터의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 활동을 벌인 독립운동가.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신형식(申亨植)·신학구(申學求) 등 문중 사람들과 같이 3월 30일 청원군 미원장터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 후 일경의 추적을 피해 잠적하였다가 1920년 9월에 동지인 이종만(李鍾萬)의 집에서 신형식 등과 비밀리에 회합하여 상해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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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양재성(楊在成)[1899~?]은 1899년 7월 24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덕촌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9일 청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진행된 청주 3·1운동 모의에 참여하였다. 1919년 당시 경성 중앙학교 학생이었던 신영호(申鍈浩)는 1919년 3월 1일부터 3월 4일까지 경성에서 3·1운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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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의병. 양치선[1890~?]은 1890년 청주에서 태어나 농업에 종사하였다. 1908년부터 오양선(吳良善) 의진에서 항일 의병 항쟁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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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30일 같은 동리에 거주하는 박우동(朴雨東)과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격문을 작성하여 각 동리에 돌리며 거사를 준비하였다. 4월 1일 거사 당일 청원군 미원장터에서 인근 주민 다수를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날의 만세시위는 전날 격렬한 만세시위로 인해 대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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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윤병운(尹秉運)[1927~1944]은 1927년 4월 15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장동리에서 태어나 경성[현 서울특별시]에 유학하였다. 성남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2년 4월 학우 박원배(朴源培)·박병양(朴秉陽) 등과 함께 항일 비밀 결사 신진당(新進黨)을 결성하였고, 민족의식 고취라는 신진당 결성의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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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30일 오후 2시경 청원군 미원장터에서 신성휴(申聖休) 등과 같이 군중 1천여 명을 규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이 때 출동한 일본 헌병이 주도자를 연행해가자 그는 시위군중들과 함께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연행된 동지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에 투석을 하는 등 격렬히 항의하였다. 이때 그는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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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김학규 지대장이 이끄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편입되어 남경지구(南京地區)에서 초모활동과 군사훈련 등의 활동을 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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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주도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1907년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1911년 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기지건설운동에 주력하였다. 그는 경학사(耕學社)의 조직에 참여했고 일시 신흥학교의 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또한 이른바 무오독립선언 때에는 39인의 대표 중 1인으로 참가하여 서명하였다. 1919년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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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국영(李國英)[1921~1956]은 1921년 1월 15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대성동에서 태어났다. 중국으로 건너간 뒤 한국혁명여성동맹에 가입하여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1941년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한국혁명여성동맹은 1940년 6월 17일 중국 중경(重慶)에서 김수현(金秀賢)·김병인(金秉仁) 등 대한민국임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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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의병. 이기석(李基石)[1873~1909]은 1873년 청주에서 태어났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당시 청주진위대 병사로 복무하고 있었다. 1907년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고종이 파견한 헤이그 밀사가 실패로 돌아갔고, 일제는 이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황태자였던 순종이 황제가 되었다. 뒤이어 한일신협약 체결로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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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의병. 이만봉(李萬逢)[1890~?]은 1890년 청주에서 태어났다. 1907년 8월 유덕삼(柳德三) 의진에 가담하여 유덕삼 휘하 약 3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총기로 무장하고 충청북도 청주·보은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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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때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한 독립운동가. 함경남도 신흥군 신흥면 279번지에서 1914년 6월 25일 과수원을 경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1927년 신흥군 신흥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0년 신흥공민농업학교를 졸업했다. 1939년부터 3년간 중국 산시성(陝西省) 태원시(太原市)에 있는 산시성립 원예시험장에서 연수를 받았다. 신흥공민농업학교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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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순국한 독립운동가. 1919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날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한봉수(韓鳳洙)[1883~1972]로부터 고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부탁받았다. 이에 그는 동지들과 상의하여 3월 30일 미원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기로 결정하고, 인근지역 주민들에게 참가를 종용하는 등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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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상옥(李相玉)[1890~1942]은 1890년 10월 2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성대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하자 청주 지역에서도 독립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고, 1919년 3월 30일 미원면 미원리 쌀안장터에서는 신경구(申敬求)·이수란(李水蘭)·신성휴(申聖休)·이용실(李容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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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회를 조직하여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리농업학교 재학 중인 1943년에 동교생 장지환(張志煥) 등을 동지로 규합하여 항일결사 화랑회(花郞會)를 조직하고, 대표로 활약하였다고 한다. 화랑회는 일제 식민지 통치에 대한 항거를 목적으로 한 행동결사로서 무력봉기를 계획하였다. 이들의 행동방략은 우선 총기 및 폭약 등을 탈취하여 무장을 갖춘 후 주재소 및 경찰서를 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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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성태(李聖泰)[1886~?]는 1886년 4월 13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화원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하자 이성태는 1919년 4월 1일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장날을 기하여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한 뒤 30여 명의 마을 사람들을 독려하여 시위를 전개하였다. 19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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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적은 충청북도 청주군 미원면 쌍이리[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쌍이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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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시우(李始雨)[1894~1934]는 1894년 7월 5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신대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하자 이시우는 북이면사무소에서 같이 서기로 근무하고 있던 김호상(金浩相)·김정환(金貞煥)·장성이(張星伊)와 함께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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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30일 오후 1시경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장터에서 이수란(李水蘭)·신경구(申敬求) 등 동지들과 같이 1천 여 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때 일본 헌병이 출동하여 신경구 등 동지를 연행해 가자 그는 군중들을 인솔하여 주재소로 달려가 투석전을 전개하며 격렬하게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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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우민(李愚珉)[1891~1943]은 1891년 11월 6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구방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충청북도 괴산군 오천시장에서 전개된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태(答) 90도를 맞는 고초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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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의병. 이원선(李元先)[1880~?]은 1880년 청주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1907년에는 군대를 강제 해산하는 등 일제의 국권 침탈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자 전국에서 항일 의병 항쟁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원선도 항일 의병 항쟁에 동참하여 1907년 유현서(柳鉉西)의 의진에 가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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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윤장(李允章)[1923~2018]은 1923년 5월 6일 청주에서 태어났다. 1938년 중국에서 고운기(高雲起)가 대장으로 있던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에 입대하여 청년공작대 대원으로 활동하며 항일 투쟁을 전개하다가 1940년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편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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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윤철(李允哲)[1925~2017]은 1925년 1월 29일 청주에서 태어났다. 1930년대 말 광서성 유주에서 고운기(高雲起)가 대장으로 있던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 청년공작대에 형 이윤장(李允章)과 함께 입대하여 방순희(方順熙)·김병인(金秉仁)·김효숙(金孝淑) 등과 함께 대원으로 활동하였다.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는 한국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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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인찬(李仁粲)[1909~1998]은 1909년 9월 11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은곡리에서 태어났다. 청주공립고등보통학교[현 청주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0년 같은 학교에 다니던 박우양(朴憂陽), 청주공립농업학교 학생이던 박노섭(朴魯燮) 등과 함께 광주학생운동 지지 운동을 계획하였고, 1930년 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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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 국운이 기울어가던 한말. 함경남도 안변군 배화면 수여리 5번지에서 태어나 만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길림성(吉林省)에서 세운 제일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민족교육의 필요성을 절감, 신창학교와 길흥고등소학교 등을 설립, 육영사업에 투신하였다. 길림성 한교동향회(韓僑同鄕會) 상무 간사에 1929년 2월 임명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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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을 전개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원활동을 벌인 독립운동가. 경술국치를 통분히 여긴 그는 스승 김제환(金濟煥)과 함께 일제에 항거하다가 1913년 일경에 피체되어 고초를 겪었다. 그 후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던 그는 1920년 2월 서울에서 김광제(金光濟) 등과 더불어 조선노동대회(朝鮮勞動大會)를 조직하여 노동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해 5월에는 김영만(金榮萬) 등 89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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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 등 항일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 1918년 동지들과 같이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청년구락부(靑年俱樂部)를 조직하고 기관지로『신청년(新靑年)』을 발간하였다. 1920년 3월 17일에는 『신조선(新朝鮮)』잡지의 기자로서 이달(李達) 등과 같이 3·1운동 1주년을 맞이하여 동지를 규합하여 시위운동을 결행할 것과 일본 제국의회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계획을 추진하려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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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의병. 이호습(李鎬濕)[1882~?]은 1882년 청주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1907년에는 군대를 강제 해산하는 등 일제의 국권 침탈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자 전국에서 항일 의병 항쟁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호습도 항일 의병 항쟁에 동참하여 1907년 유현서(柳鉉西)의 의진에 가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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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임동묵(林東默)[1910~1962]은 1910년 11월 8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두모리에서 태어났다. 1930년 청주농업학교 3학년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 동조 시위에 가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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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임병철(林炳喆)[1924~2010]은 1924년 5월 29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신대리에서 태어나 1940년 4월 일본 도쿄의 와세다고등공학교에 입학하였다. 한인 유학생 가운데 같은 고향인 북이면 현암리 출신으로 도쿄부립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최세균(崔歲均), 북이면 대율리 출신으로 와세다공수학교에 재학 중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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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임헌근(林憲根)[1920~1951]은 1920년 4월 25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문동리에서 태어났다. 1942년 5월 군속으로 강제 징집되어 부산에서 2개월간 훈련을 받고 1942년 9월 14일 1,400명의 한인 청년들과 함께 인도네시아 자바의 딴중 쁘리옥(tanjon priok)항에 도착하였다 1944년 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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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장성이(張星伊)[1896~1938]의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아버지는 장천석(張千錫)이다. 장성이(張成伊)로도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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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장터의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순국한 독립운동가. 1919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활약한 한봉수(韓鳳洙)[1883~1972]로부터 고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부탁받고, 동지들과 상의하여 3월 30일 미원장터의 만세시위를 주도하기로 결의하고 부락민을 동원하였다. 그는 이날 미원장터에서 1천여 명의 시위군중 앞에서 「독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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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장터의 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30일 청원군 미원 장터에서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때 인근의 미원 헌병주재소에서 헌병이 출동하여 주도자를 연행하여 갔다. 이에 격분한 그는 군중들과 함께 주재소로 쇄도하여 투석전을 전개하며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사태의 위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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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순만(鄭淳萬)[1873~1911]은 1873년 3월 3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덕촌리에서 태어났다. 1890년 배재학당에서 수학하였고, 1896년 고향인 청주에서 전기 의병에 참여한 뒤 독립협회에서 활동하였다.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 도총무부장으로 활동하며 민중 계몽과 항일 운동에 앞장섰고, 1903년 부회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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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양필(鄭良弼)[1893~1975]은 1893년 12월 1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덕촌리에서 정순만(鄭淳萬)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4년 말 아버지 정순만의 의형제였던 박용만(朴容萬)을 따라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이승만(李承晩)의 아들 이봉수(李鳳秀)와 함께 1905년 2월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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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유흥(鄭有興)[1901~?]은 1901년 10월 15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사천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지금의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 출신인 신영호(申鍈浩)는 3·1운동 당시 경성 중앙학교에 재학 중이었는데, 만세 시위로 휴교령이 떨어지자 ‘경고아이천만동포(警告我二千萬同胞)’라는 제목의 문건을 입수하여 청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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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항쟁을 하다가 피체되어 순국한 독립운동가. 1907년 4월 초에 고향 청주에서 한봉수(韓鳳洙)[1883~1972]와 함께 의병으로 봉기하여 군자금 모금 등의 활동을 하였다. 5월 10일(음력)에는 괴산군 서면 모래재[沙峙]에서 한봉수와 함께 일본 수비대 2명이 우편물을 호위하며 통과하는 것을 확인하고 습격하여 일본군 2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물품을 노획하였다. 한편 청주군 북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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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해원(鄭海元)[1900~1983]은 1900년 2월 5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덕촌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지금의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 출신인 신영호(申鍈浩)는 3·1운동 당시 경성 중앙학교에 재학 중이었는데, 만세 시위로 휴교령이 떨어지자 ‘경고아이천만동포(警告我二千萬同胞)’라는 제목의 문건을 입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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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와 의열단에 참여하고, 구미 열강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벌인 독립운동가. 일찍이 만주로 건너갔다가 1919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신규식(申圭植)[1879~1922]의 밀명을 받고 국내에 들어와 스코필드 박사가 촬영한 일제의 학살 장면 등의 사진 50매를 임시정부에 전달하여 일제의 잔인성을 세계에 폭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활동과 연유해서 1919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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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강내면에서 횃불시위를 주도하여 인근지역의 만세시위를 파급시킨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23일부터 3일간에 걸쳐 밤마다 청원군 강내면 태성리 산위에서 부락민 수십명과 함께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첫날인 23일에는 면내의 18개 부락과 인접한 강외·옥산·남이면 등지에서도 호응하여 횃불을 올리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에 일제는 청주와 조치원 등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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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의병. 조성여(趙聖汝)[1865~1907]는 1865년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두릉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 9월부터 청주 및 목천[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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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진위대 해산군인 출신으로서 의병에 참전하였다가 순국한 독립운동가. 1907년 7월 청주 진위대(淸州鎭衛隊) 일등병 출신으로서 일제에 의한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해산에 항거하여 의병장 노병대(盧炳大)의 우익장(右翼將)으로서 충청북도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 후 동년 9월경 의병장이 되어 의병 70여 명을 이끌고 청주·보은 부근에서 활동하다가 1908년 10월 일경에게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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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의병. 천성십(千聖十)[1863-1907]은 1863년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두릉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 9월부터 청주 및 목천[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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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각종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주도한 독립운동가. 1907년 충남 목천(木川) 교회 전도사로서 청소년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이시영(李始榮)·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경학사(耕學社)와 부민단(扶民團) 등 한인 단체를 조직하여 재만 한인의 경제적 지위 향상에 노력하는 한편 독립운동기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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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봉원(崔鳳源)[1879-1923]은 1879년 2월 17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화원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하자 청주 지역에서도 독립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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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세균(崔歲均)[1925~1943]은 1925년 8월 24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현암리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유학하였다. 도쿄부립고등학교에 재학하는 동안 점점 한인에 대한 민족 차별에 모멸감을 느꼈고, 내선일체의 허구성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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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결사 다혁당에 참여하여 학생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인 1941년 2월 15일 동교생 권쾌복(權快福) 등 15명과 함께 당시 대구 대봉정(大鳳町) 소재 유흥수(柳興洙)의 하숙집에 모여 항일학생 비밀결사인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하였다. 다혁당은 앞서 결성되었던 동교의 항일학생조직인 문예부(文藝部)와 연구회(硏究會)를 계승·발전시켜 조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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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의병. 최치로(崔致魯)[1866~?]는 1876년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덕유리에서 태어났다. 1909년 2월 차호연(車鎬然)·이선연(李善連) 의진에 가담하여 항일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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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의병. 한경천(韓敬川)[1879~?]은 1879년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화하리에서 태어나 청주 출신 의병장 한봉수(韓鳳洙)의 의진에 가담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5월 9일에는 의병장 한봉수와 함께 청주군 산외일면[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에서 매복하여 있다가 일본군의 무장 호위를 받으며 호송되던 우편물을 탈취하여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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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한병호(韓秉浩)[1880~1938]는 1880년 3월 17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석실리에서 태어났다. 1920년 12월 17일 같은 마을에 사는 유영창(柳永昌)의 집에서 청주 낭성면 호정리에 거주하고 있던 신형식(申亨植)을 만나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지원 활동을 하기로 결의하였고,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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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에는 의병장으로 국권회복운동을 하였으며 3·1운동 때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1907년 의병투쟁에 나선 이후 1910년 5월 일제에 피체될 때까지 충청북도 일원은 물론 경상·강원지역 등 광범한 지역을 무대로 20여회에 걸쳐 격렬한 투쟁을 벌인 중부지방의 후기 의병장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한봉수(韓鳳洙)[1883~1972]는 평민으로 구성된 소규모의 부대를 이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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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의병. 함관서(咸寬西)[1875~?]는 1875년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1907년에는 군대를 강제 해산하는 등 일제의 국권 침탈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자 전국에서 항일 의병 항쟁이 거세게 일어났다. 함관서도 청주 지역을 중심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항일 의병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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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에 참여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원 활동을 벌인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1일 천도교인으로서 최동호(崔東昊) 등과 함께 조선은행 앞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해 5월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적극 협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임시정부의 기관지인『독립신문(獨立新聞)』제작에 참여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서울에서 최동호·정창수(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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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군정서 의용대원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순국한 독립운동가. 만주로 망명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의용대원(義勇隊員)으로 항일운동을 하던 중 일경에게 피체되어 1922년 5월 16일 평북 강계(江界) 벌등진(伐登鎭)에서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