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4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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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興培 |
영어공식명칭 | Gim Heungba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욱재 |
출생 시기/일시 | 1901년 8월 15일 - 김흥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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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19년 - 김흥배 청주공립농업학교 입학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0일 - 김흥배 청주 3·1운동 모의 가담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31일 - 김흥배 공주지방법원 청주지검에서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 |
활동 시기/일시 | 1957년 - 김흥배 청주공립농업학교에서 명예 졸업장 수령 |
몰년 시기/일시 | 1986년 7월 3일 - 김흥배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22년 8월 15일 - 김흥배 대통령표창 추서 |
출생지 | 김흥배 출생지 - 충청북도 청주시 |
거주|이주지 | 김흥배 거주지 - 충청북도 청주군 청주면 청수정[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
학교|수학지 | 김흥배 수학지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덕로 45[내덕동 322] |
활동지 | 김흥배 활동지 - 충청북도 청주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흥배(金興培)[1901~1986]는 1901년 8월 15일 청주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9일 청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진행된 청주 3·1운동 모의에 참여하였다. 1919년 당시 경성 중앙학교 학생이었던 신영호(申鍈浩)는 1919년 3월 1일부터 3월 4일까지 경성에서 3·1운동을 목격하게 되었고, 조선의 독립을 고취하는 내용이 담긴 격문을 입수하여 본가가 있는 청주로 귀향하였다. 신영호는 3월 9일 청주공립농업학교로 가서 여러 학생들에게 격문을 보이고 청주에서도 만세 시위를 벌이자고 제안하였다. 오석영·이수천·이요습·서상경·양재성·임창수·이철우·박승하·신태동 등 청주공립농업학교 2학년들이 주축이 되고, 1학년이던 김흥배·정해원·정유흥·오성환·김동현 등도 동참하여 3월 11일 만세 시위를 거행하기로 결의하였다.
김흥배는 신영호·오석영 등과 함께 청수정[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에 있던 자신의 집에서 격문 300여 매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준비하였다. 거사를 하루 앞둔 3월 10일 학생들의 동태를 수상하게 여긴 학교 측과 일제 경찰이 기숙사와 가택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격문과 태극기가 발각되어 김흥배를 비롯한 학생들이 일제 경찰에 연행되었다. 김흥배는 1919년 3월 31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검에서 불기소 처분이 내려져 석방되었지만 청주공립농업학교로부터는 퇴학 처분을 받았다. 1957년 개교 57주년을 맞이하여 청주농업고등학교는 당시 퇴학 처분을 받았던 학생들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하였다. 김흥배는 1986년 7월 3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흥배의 공적을 기려 2022년 8월 15일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