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4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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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致良 |
영어공식명칭 | Bak Chiyang |
이칭/별칭 | 최호경(崔鎬璟)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욱재 |
출생 시기/일시 | 1878년 - 박치양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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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박치양 항일 의병 가담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8월 - 박치양 공주감옥 청주분감에서 탈옥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12월 27일 - 박치양 일제 경찰에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3월 29일 - 박치양 경성공소원에서 항소 기각으로 종신형 확정 |
활동 시기/일시 | 1915년 - 박치양 징역 7년 3월 20일로 감형 |
추모 시기/일시 | 2014년 3월 1일 - 박치양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박치양 출생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계원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성 |
[정의]
개항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의병.
[활동 사항]
박치양(朴致良)[1878~?]은 1878년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계원리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1907년에는 군대를 강제 해산하는 등 일제의 국권 침탈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자 전국에서 항일 의병 항쟁이 거세게 일어났다. 박치양도 1908년 초 의병에 투신하여 충청북도 보은군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박치양은 의병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공주감옥 청주분감에 구류 중이던 1909년 8월 탈출을 감행하였고, 이후 경상북도 풍기군에서 봉기한 조운식(趙雲植) 의진의 참모로 활동하며 경상북도 및 충청북도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박치양은 조운식 등과 함께 보은군 속리산에 주둔하고 있다가 1909년 12월 27일 영동경찰서 순사대에 체포되었고, 1910년 2월 14일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에서 이른바 내란 및 파옥탈주죄로 종신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0년 3월 29일 경성공소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어 종신형이 확정되었다. 박치양은 1912년에 징역 12년, 1914년 징역 9년, 1915년 징역 7년 3월 20일로 감형되었다. 최호경(崔鎬璟)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박치양의 공적을 기려 2014년 3월 1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