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4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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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千福 |
영어공식명칭 | Gim Cheonbok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팔봉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욱재 |
출생 시기/일시 | 1881년 - 김천복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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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김천복 군대 해산 뒤 무력 항쟁 가담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8월 - 김천복 체포 |
추모 시기/일시 | 2015년 8월 15일 - 김천복 건국포장 추서 |
출생지 | 김천복 출생지 -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팔봉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성 |
[정의]
개항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의병.
[활동 사항]
김천복(金千福)[1881~?]은 1881년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팔봉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 7월 24일, 제3차 한일협약과 함께 조인된 비밀 각서에 따라 군대가 해산되었다. 대한제국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은 군대 해산 명령을 따르지 않고 “군인으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니 만 번 죽어도 무엇이 아깝겠는가[軍不能守國 臣不盡忠 萬死無惜]”라는 유서를 남기고 대대장실에서 자결하였다. 박승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분노한 병사들이 남대문 등에서 무력 항쟁을 일으켰고, 항쟁 전개 과정에서 일본군에 밀려 결국 퇴각하였다.
김천복은 1907년 8월 말 고향 청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자 탈영하였다. 이후 건축 일을 하다가 평소 친하게 지내던 해산 군인 김태선(金泰先)을 만나 남도 의병에 참여하여 활동하기를 서로 의논하고 있던 중에 체포되었다. 김천복은 1907년 11월 30일 평리원에서 내란 혐의로 유형 5년형을 언도받았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천복의 공적을 기려 2015년 8월 15일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