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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0653
한자 崔明洙
영어음역 Choe Myeongsu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박걸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별
생년 1885년연표보기
몰년 1951년연표보기
중산(仲山)
출신지 충청북도 청주
상훈 대통령표창[1977년]|건국훈장 애국장[1991년]

[정의]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각종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주도한 독립운동가.

[활동사항]

1907년 충남 목천(木川) 교회 전도사로서 청소년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이시영(李始榮)·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경학사(耕學社)와 부민단(扶民團) 등 한인 단체를 조직하여 재만 한인의 경제적 지위 향상에 노력하는 한편 독립운동기지의 건설에 참여하였다.

1919년에는 한족회(韓族會)에 참가하여 헌병과장·검무감 등으로 친일분자 처단에 앞장섰으며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중앙의회 의장직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22년에는 재만 독립운동 단체가 통합되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조직하게 되자 검무국장(檢務局長)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1924년에는 다시 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 대표로서 정의부(正義府) 조직에 참가하였으며 정의부가 조직된 후에는 검무감(檢務監)에 임명되어 항일무장투쟁을 계속하였다.

1928년 8월에는 3부(三府) 통합 운동이 일어나게 됨에 따라 정의부 제5회 정기중앙의회가 개최되었는데, 그는 민족유일당재만촉성회(民族唯一黨在滿促成會)를 지지하는 중앙집행위원 이청천(李靑天))·김동삼 등과 함께 시국문제 토의 중 혼란이 일어나자 퇴장하게 됨으로써 3부 통합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후 1928년 국민부(國民府)가 조직되자 간부에 임명되어 항일무장투쟁을 계속하다가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여 점령하자 이청천과 함께 상해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상해에서 활동하다가 1935년 2월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인천을 거쳐 신의주로 압송되었으며, 결국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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