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03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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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孫秉熙 |
영어공식명칭 | Son Byeonghui |
이칭/별칭 | 손응구(孫應九),손상현(孫祥鉉),이상헌(李祥憲),송상헌(宋祥憲)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걸순,한애라 |
출생 시기/일시 | 1861년 4월 8일 - 손병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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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82년 - 손병희 동학 입교 |
활동 시기/일시 | 1892년 - 손병희 교조 신원 운동 참가 |
활동 시기/일시 | 1894년 - 손병희 호서동학군 통령으로 동학농민운동 참가 |
활동 시기/일시 | 1897년 12월 24일 - 손병희 동학 제3대 교주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01년 - 손병희 일본 망명 |
활동 시기/일시 | 1905년 12월 - 손병희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1월 - 손병희 일본에서 귀국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일 - 3·1운동 발생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일 - 손병희 태화관에서 거행된 독립 선언식 주도 후 수감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10월 30일 - 손병희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 언도 |
몰년 시기/일시 | 1922년 5월 19일 - 손병희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손병희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
출생지 | 손병희 출생지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 |
묘소 | 손병희 묘소 -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 산28-1 |
성격 | 종교인|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천도교 교주 |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종교인이자 독립운동가.
[가계]
손병희(孫秉熙)[1861~1922]의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도호는 의암(義菴)이다. 어릴 적 이름은 손응구(孫應九)이고, 족보명은 손상현(孫祥鉉)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손박(孫璞)이고, 할아버지는 손광택(孫光澤)이다. 아버지는 손두흥(孫斗興)이고, 어머니는 경주 최씨(慶州 崔氏)이다. 손병희는 이상헌(李祥憲)·송상헌(宋祥憲)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다.
[활동 사항]
손병희는 1861년 4월 8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에서 태어났다. 1882년 동학에 입교하였고, 1884년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수련을 하며 지도를 받았다. 1892년부터 교조인 최제우의 신원을 회복하기 위한 교조 신원 운동에 참가하였고,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 때에는 호서동학군 통령으로 동학군을 이끌며 관군을 격파하였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후퇴하여 은신하였다.
손병희는 1897년 동학 제3대 교주가 되어 교세 확장에 힘쓰다가 1901년부터 1906년 귀국할 때까지 중국 상해를 거쳐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하였다. 손병희는 망명 생활 중 근대 문물을 접하고 개화파 세력과 유학생들을 만나 국내외 사정을 들으며 기존의 반봉건·반제국주의 노선에서 문명 개화 운동으로 노선을 전환하였다. 1903년에 『삼전론(三戰論)』을 저술하였고, 1904년에는 갑진 개화 운동을 주도하였다. 1905년 12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1906년 1월 귀국하였다.
손병희는 귀국 직후부터 천도교 조직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면서 1906년 7월에는 천도교 내 친일 세력을 출교시켰고, 출판사인 보성사(普成社)를 창설하고 보성학교와 동덕여자의숙을 인수하여 교육과 계몽 사업에도 공헌하였다. 1908년 박인호(朴寅浩)에게 교주 자리를 인계하고 우이동에 머물며 수도에 전념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의 종결이 다가오고 파리강화회의와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에 고무되어 손병희는 평소에 뜻을 같이하던 최린(崔麟)·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과 함께 독립을 위한 제반 사항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이때 3·1운동의 근간이 된 대중화·일원화·비폭력화의 3대 원칙에 합의하고 각 교계의 중심 인사들을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1919년 1월 하순에 천도교·기독교·불교계 인사들과 논의하였고, 2월 26일 최린이 최남선(崔南善)과 협의 끝에 작성한 독립선언서와 청원서·의견서 등의 초안을 권동진·오세창과 함께 검토한 후 보성사에서 인쇄하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경 민족 대표들은 서울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였고, 손병희는 민족 대표 중의 대표자로서 엄숙한 독립 선언식의 진행을 주도하였다. 손병희는 독립 선언식을 마치고 만세 삼창 후에 출동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고, 수감 생활 중 병보석으로 출옥하여 요양하다가 1922년 5월 19일 사망하였다.
[묘소]
손병희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 산28-1에 있다. 서울 손병희 묘소는 2012년 10월 19일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손병희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