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4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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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鳳源 |
영어공식명칭 | Choe Bongw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한애라 |
출생 시기/일시 | 1879년 2월 17일 - 최봉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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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30일 - 최봉원 청주 미원리 쌀안장터 만세 시위 참여 및 피체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5월 5일 - 최봉원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6월형 언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6월 23일 - 최봉원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 언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8월 16일 - 최봉원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상고 기각으로 징역 1년형 확정 |
몰년 시기/일시 | 1923년 8월 31일 - 최봉원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9년 - 최봉원 대통령표창 추서 |
출생지 | 최봉원 출생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화원리 |
활동지 | 최봉원 활동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미원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최봉원(崔鳳源)[1879-1923]은 1879년 2월 17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화원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하자 청주 지역에서도 독립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1919년 3월 30일 오후 2시 무렵 미원면 미원리[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미원리] 쌀안장터 사거리에서 100여 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고, 신경구(申敬求)·이수란(李水蘭)·신성휴(申聖休)·이용실(李容實) 등이 앞장서서 시위를 이끌었다. 주변에 있던 주민과 장꾼들이 합류하여 시위 대열은 순식간에 1,000여 명으로 불어났고, 출동한 일제 경찰이 주동자 신경구를 체포하여 연행하자 시위 군중은 주재소 앞으로 이동하여 신경구의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일제 경찰의 위협에 돌을 던지며 맞서던 시위대가 주재조 안으로 진입하려 하자 경찰은 실탄을 발사하여 장일환(張一煥)과 이병선(李炳善)을 살해하였고, 곧이어 도착한 응원 병력이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최봉원은 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던 중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1919년 5월 5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및 소요 혐의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9년 6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오히려 형량이 늘어나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았고, 1919년 8월 16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상고 기각으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최봉원은 1923년 8월 31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최봉원의 공적을 기려 200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