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4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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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鳳來 |
영어공식명칭 | Bak Bongra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석판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욱재 |
출생 시기/일시 | 1870년 2월 8일 - 박봉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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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5년 - 박봉래 신한혁명당 활동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15년 10월 30일 - 박봉래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형 언도 |
몰년 시기/일시 | 1954년 1월 2일 - 박봉래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0년 8월 15일 - 박봉래 대통령표창 추서 |
출생지 | 박봉래 출생지 -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석판리 |
거주|이주지 | 권농동 - 서울특별시 종로구 권농동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박봉래(朴鳳來)[1870~1954]는 1870년 2월 8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석판리]에서 태어났다. 경성에서 궁내부주사로 일하면서 권농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권농동]에 거주하였으며,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신한혁명당은 1915년 3월 상해에서 이상설(李相卨)·신규식(申圭植)·유동열(柳東說)·이춘일(李春日)·성낙형(成樂馨) 등이 모여 결성한 독립운동 단체이다. 신한혁명당은 독립 전쟁 수행을 위한 군비를 조달하고 각국의 원조를 취하기 위한 외교적 수단으로 중국과의 중한의방조약(中韓誼邦條約) 체결을 도모하였다. 중한의방조약은 한국에 독립 전쟁이 발발할 경우 중국 측에서 군자금 및 병기를 공급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중한의방조약 체결의 임무는 당시 외교부장이었던 성낙형에게 주어졌으며, 국내에 있던 박봉래·심인택(沈仁澤)·정일영(鄭日永) 등이 상의하였다.
박봉래는 성낙형이 작성한 「국내 동포에게 주는 경각서」를 변석붕(變錫鵬)으로부터 건네받아 윤용구(尹用求)·오정근(吳正根) 등 구(舊) 양반들을 동지로 규합하고자 시도하였다. 이후 성낙형이 조약의 내용을 가지고 고종과 알현하기 직전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본부 파견 당원 및 국내 활동 당원 모두가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었고, 박봉래는 1915년 10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박봉래는 1954년 1월 2일 사망하였다.
[묘소]
박봉래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박봉래의 공적을 기려 2000년 8월 15일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