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4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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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正烈 |
영어공식명칭 | Seo Jeongryeol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미원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한애라 |
출생 시기/일시 | 1882년 12월 24일 - 서정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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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30일 - 서정렬 미원장터 만세 시위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5월 5일 - 서정렬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0월형 언도 |
몰년 시기/일시 | 1944년 3월 1일 - 서정렬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 서정렬 건국포장 추서 |
출생지 | 서정렬 출생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미원리 |
활동지 | 미원리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미원리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서정렬(徐正烈)[1882~1944]은 1882년 12월 24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미원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하자 청주 지역에서도 독립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1919년 3월 30일 오후 2시 무렵 미원리 쌀안장터 사거리에서 100여 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고, 서정렬은 이수란(李水蘭)·신경구(申敬求)·신성휴(申聖休)·이용실(李容實) 등과 함께 앞장서서 시위를 이끌었다. 주변에 있던 주민과 장꾼들이 합류하여 시위 대열은 순식간에 1,000여 명으로 불어났고, 출동한 일제 경찰이 주동자 신경구를 체포하여 연행하자 시위 군중은 주재소 앞으로 이동하여 신경구의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일제 경찰의 위협에 돌을 던지며 맞서던 시위대가 주재조 안으로 진입하려 하자 경찰은 실탄을 발사하여 장일환(張一煥)과 이병선(李炳善)을 살해하였고, 곧이어 도착한 응원 병력이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미원면 만세 시위는 3월 31일과 4월 1일, 4월 7일까지 이어졌으며, 서정렬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1919년 5월 5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서정렬은 1944년 3월 1일 사망하였다.
[묘소]
서정렬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서정렬의 공적을 기려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