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4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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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聖汝 |
영어공식명칭 | Jo Seongyeo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두릉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한애라 |
출생 시기/일시 | 1865년 - 조성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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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7년 9월 - 조성여 의병 가담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11월 15일 - 조성여 체포 |
몰년 시기/일시 | 1907년 11월 17일 - 조성여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3년 - 조성여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조성여 출생지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두릉리 |
거주|이주지 | 조성여 거주지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두릉리 |
활동지 | 조성여 활동지 - 충청북도 청주시 |
활동지 | 조성여 활동지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
성격 | 의병 |
성별 | 남성 |
[정의]
개항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의병.
[활동 사항]
조성여(趙聖汝)[1865~1907]는 1865년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두릉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 9월부터 청주 및 목천[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일제의 강압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었으며, 이후 일제는 식민지 지배 정책을 시행하기 위한 철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1907년 을사늑약 체결의 부당성을 전 세계에 알리려던 헤이그 특사 파견에 실패한 뒤 고종이 퇴위를 당하였고, 이어서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이 체결되어 군대가 강제 해산되는 등 일제의 국권 침탈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자 전국적으로 항일 의병 항쟁이 거세게 전개되었다.
1907년 9월 조성여는 인근에 살고 있던 천성십(千聖十)·김성관(金聖寬)·박반문(朴扳文) 등과 함께 의병에 가담하여 청주와 목천 등지에서 군수품을 모집하고 의병들의 총기를 수리하여 주는 등 지원 활동을 펼쳤다.
조성여는 1907년 11월 15일 천성십의 집에서 천성십·김성관·박반문 등과 함께 식사를 하던 중 조치원역 출장소의 염도일(廉道一) 등 두 명의 순사에게 체포되었고, 11월 17일 청주경찰분서로 호송 도중 포승줄을 풀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총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조성여의 공적을 기려 200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