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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3450
한자 申鼎植
영어공식명칭 Shin Jeongsik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미원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욱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9년 9월 12일연표보기 - 신정식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30일 - 신정식 청주 미원리 쌀안장터 만세 시위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5월 5일 - 신정식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0월형 언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8월 16일 - 신정식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상고 기각으로 징역 10월형 확정
몰년 시기/일시 1942년 4월 12일연표보기 - 신정식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6년 8월 15일연표보기 - 신정식 건국포장 추서
출생지 신정식 출생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대신리지도보기
활동지 신정식 활동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미원리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신정식(申鼎植)[1869~1942]은 1869년 9월 12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대신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하자 청주 지역에서도 독립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1919년 3월 30일 오후 2시 무렵 미원면 미원리[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미원리] 쌀안장터 사거리에서 100여 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고, 신경구(申敬求)·이수란(李水蘭)·신성휴(申聖休)·이용실(李容實) 등이 앞장서서 시위를 이끌었다. 주변에 있던 주민과 장꾼들이 합류하여 시위 대열은 순식간에 1,000여 명으로 불어났고, 출동한 일제 경찰이 주동자 신경구를 체포하여 연행하자 시위 군중은 주재소 앞으로 이동하여 신경구의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일제 경찰의 위협에 돌을 던지며 맞서던 시위대가 주재조 안으로 진입하려 하자 경찰은 실탄을 발사하여 장일환(張一煥)이병선(李炳善)을 살해하였고, 곧이어 도착한 응원 병력이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신정식신학구(申學求)·서정렬(徐正烈) 등과 함께 지팡이와 곤봉을 들고 마을 밖에서 장을 보고 돌아가는 사람들을 격려하며 시위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다. 이후 신정식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1919년 5월 5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9년 6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1심 형량이 유지되었고, 1919년 8월 16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상고 기각으로 징역 10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신정식은 1942년 4월 12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신정식의 공적을 기려 2006년 8월 15일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 3(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1)
  •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 「판결문」(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 1919. 5. 5.)
  • 「판결문」(경성복심법원, 1919. 6. 23.)
  • 「판결문」(고등법원 형사부, 1919.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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