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4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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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基石 |
영어공식명칭 | I Giseok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욱재 |
[정의]
개항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의병.
[활동 사항]
이기석(李基石)[1873~1909]은 1873년 청주에서 태어났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당시 청주진위대 병사로 복무하고 있었다. 1907년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고종이 파견한 헤이그 밀사가 실패로 돌아갔고, 일제는 이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황태자였던 순종이 황제가 되었다. 뒤이어 한일신협약 체결로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면서 많은 해산 군인들이 항일 의병 항쟁에 가담하였다.
이기석은 1907년 7월경 군대가 해산되자 직무가 해임되었고, 이를 일제의 만행이라 여겨 일본인을 혐오하게 되었다. 1907년 7월 17일 청안군 원서면[현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구정탄(九鼎灘) 주막에서 도박을 즐기던 중 일본군 낙오병 도전청오랑(島田淸五郞)과 율유길(栗留吉)이 주막에 묵게 되자 이기석은 배창근(裵昌根)·서쾌준(徐快準) 등과 함께 처단을 계획하였다.
1907년 7월 18일 이기석은 일행들과 함께 길을 나서는 일본군 두 명을 뒤따라가 총살하였고, 이후 경찰에 체포되어 1908년 11월 9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공소하였으나 1909년 5월 20일 경성공소원 형사부에게 공소가 기각되었고, 1909년 6월 7일 대심원 형사부에서 상고 또한 기각되었다. 이기석은 1909년 7월 17일 경성감옥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이기석의 공적을 기려 2013년 3월 1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