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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청이나 고을에 과거 부임하였던 전임관, 수령 등 벼슬아치의 명단. 조선시대 중앙과 지방의 각 기관과 관아에서 전임 관원의 성명·관직명·생년·본적·취임 및 이임시기(移任時期)·치적(治績) 등을 적어놓은 책으로 일명 『안책(案冊)』이라 하기도 하고 흔히 지방에는 「수령안(守令案)」이라고 하여 명단이 전하고 있다. 작성 시기를 기준해 볼 때 등재 인물이 현임자의 전임자(前任者)라는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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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철 큰 가뭄에 비 내리기를 하늘에 빌었던 제사. 고대 이래로 조정과 지방관청, 민간을 막론하고 가뭄이 들면 기우제가 성행하였다. 청주지역에서는 흥덕구 사직동 사직단과 상당구 우암동 와우산(臥牛山), 흥덕구 비하동 부모산성, 상당구 산성동 청주 상당산성에서 제물을 차려놓고 기우제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는 청주목사가 읍성 서쪽 사직단에 제물을 차려놓고 기우제를 지냈다. 가뭄이 더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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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2년(성종 3) 성종(成宗)이 왕위에 오를 때 공을 세운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행호조판서(行戶曹判書) 김길통(金吉通)에게 주어진 4등 좌리공신 녹권(錄券). 좌리공신(佐理功臣)은 성종의 즉위에 공훈(功勳)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 것으로 1·2·3·4 등급이 있다. 1등 공신은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이라 하였고, 2등 공신은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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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충청북도 청주 지역으로 확대된 농민 전쟁. 충청도의 농민 전쟁은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고 상품 화폐 경제가 보급됨에 따라 농민층이 분화되는 한편, 전정, 군정, 환곡의 삼정 수탈이 강화되고, 수령과 서리의 탐학 현상이 일어남에 따라 발생하였다. 충청도 토지의 소유 관계에서는 11.6%의 주민이 47.1%의 토지를 소유한 반면, 61.5%의 주민이 30.1%의 토지를 소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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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을 선발하는 무과시험에 합격한 사람. 조선시대 무과는 문과와 더불어 핵심지배계층을 형성하는 공식적인 선발과정이었다. 무과시험제도가 고려시대에는 없었으며, 조선이 개국하면서 새롭게 설치되었다. 문과시험과 달리 예비시험이 없고 대과만 시행되었는데, 초시, 복시, 전시를 거쳐 28명을 선발하였다. 별도의 장원을 선발하지 않고 급제한 사람들에게는 홍패를 지급하였다. 청주 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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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8년(영조 4)에 소론(少論) 과격파들과 남인(南人)이 영조(英祖)와 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일으킨 난. 1728년에 일어난 무신란은 노론(老論)이 지지하는 영조의 즉위로 위협을 느낀 소론의 과격파들과 남인이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증손(曾孫)인 밀풍군 탄(坦)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일으킨 난이다.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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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문과(文科) 전시(殿試)에 합격한 유생. 대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사마시는 각 지방별로 소과를 치러 초시에서 보통 700명 정도를 선발하고, 이 합격자를 대상으로 복시를 치러 100명을 선발하여 합격자에게 백패를 지급한다. 이 사마시 합격자는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다시 수학한 후 대과에 응시하는데 통상 3단계를 거친다. 우선 초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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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이후의 문신과 무신의 총칭. 고려 4대 왕 광종(光宗)[946~975]은 후주(後周) 사람인 쌍기(雙冀)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도를 처음 실시하였다. 이후부터 문무의 관리를 별도의 시험을 통하여 선발하였는데, 5대 왕 경종(景宗) 때 부터는 문관을 동반(東班), 무관을 서반(西班)이라 하여 구별하였고, 이들 문반과 무반을 합하여 양반이라고 하였다. 양반은 곧 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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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의 상당산성에 주재하였던 종3품의 무관. 병마절도사를 보좌하고 상당산성에 주재하면서 산성의 운영을 관리, 책임졌던 무관직이다.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의 제도가 정립되면서 그 막료로서 도진무(都鎭撫)가 임명되었는데, 이것이 1466년(세조 12)에 병마우후(兵馬虞候)로 개칭되었다. 1651년(효종 2) 충청남도 서산의 해미(海美)에 있던 병영(兵營)을 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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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 지역에서 긴급한 군사 정보를 중앙에 전달하던 조선 시대 통신 시설. 봉수(烽燧)란 변경과 지방의 군사 정보를 중앙에 신속히 전달하기 위하여 운용한 통신 시설의 하나였다.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로 신호를 보냈다. 산정(山頂), 즉 산의 정상에 봉수 시설을 마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각종 문헌에 따르면 일찍이 삼국 시대부터 봉수제가 운용되었던 것으로 파악되는데,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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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사직동과 사창동에 있었던 조선시대 저장미를 보관하던 창고 조선시대 지방관청 소속의 저장미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던 곳으로, 조선 후기의 지리지에는 청주목 소속의 창고는 동창(東倉)과 서창(西倉)이 읍성 안에 있었으며, 서쪽으로 미호천(美湖川) 연변에 신원창과 금성창이, 북쪽에 오근창, 동쪽 멀리 청천창, 남쪽 멀리 주안창이 있었다. 이들은 세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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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의 옛 명칭인 청주목이 조선 후기 반역이나 강상을 범하는 사건으로 강등된 읍호. ‘서원(西原)’은 685년(신라 신문왕 5) 설치한 서원소경으로부터 유래하며 청주의 별칭으로 쓰였다. 조선 시대 고을에서 반역이나 강상(綱常)을 범하는 사건이 벌어질 때에 10년을 기한으로 현(縣)으로 강등하였다. 청주의 경우 모두 8차례에 걸쳐 서원현으로 강등되어 서원현감이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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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제7대 임금 세조(世祖)가 1464년 온양온천의 행궁으로 가는 도중에 청주목에 머무른 사건. 조선왕조 제7대 임금 세조가 즉위 10년(1464) 봄에 종기를 치료하고자 온양온천의 행궁으로 가는 도중에 청주목의 초수리(椒水里)[현 충청북도 청원군 내수읍 초정리]와 청주목에 6일간 머무른 사건이다. 1464년 2월 21일부터 2월 26일까지 6일간 행해진 세조의 청주 행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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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제4대 임금 세종(世宗)이 안질(눈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1444년 청주목 초수리에 행차하여 머문 사건. 조선왕조 제4대 국왕 세종은 안질(눈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1444년(세종 26) 봄과 가을 두 차례 청주목의 초수리(椒水里)[현 충청북도 청원군 내수읍 초정리]에 행차하여 약 4개월간 머물렀다. 이 기간에 세종의 눈병은 일정한 치료 효과를 보아 초수 행차의 건의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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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청주 율봉역에 속한 역. 『청주읍지(淸州邑誌)』에 의하면 율봉역에 속한 역으로 청주에서 남쪽 16리에 있고, 역로는 청주율봉역-쌍수역-율치(栗峙)-문의 덕류(德留)역-형강(荊江)역, 주안(周岸)역-옥천 증약(增若)역으로 이어진다. 쌍수역에는 역리(驛吏) 40명, 역노(驛奴) 10명, 역비(驛婢) 7명이 있고, 상등마(上等馬) 4마리, 중등마(中等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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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문서의 전달과 관리의 왕래와 숙박 및 공물진상 등의 관물 수송을 담당한 곳. 역은 참(站)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다가 1597년(선조 30) 통신만을 위주로 하는 파발을 두어서 변서(邊書)의 급한 전달을 임무로 하였던 곳이다. 신라 487년(소지왕 9) 우역(郵驛)을 설치하였고, 그 뒤 통일신라시대 이후 9주(州) 5소경(小京)이 설치되는 등 지방제도가 확립되고 중앙의 관리의 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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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죽은 후 수절하거나 순절한 여인 또는 자신의 정절(貞節)을 지키다 죽은 여성으로서 그 행실이 국가나 사회적으로 공인된 여인. 전통적으로 열녀란 개가(改嫁)할 수 있는데도 개가하지 않은 여인을 의미했으나 시대에 따라 열녀에 대한 인식이 달랐다.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통해 본 고대 열녀의 행실은 남편 또는 약혼한 남성과의 약속 이행, 훼절 거부, 복수, 종사 등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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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오동동에 있었던 조선시대 저장미를 보관하던 창고. 조선 후기의 지리지에는 청주목 소속의 지방관청 소속의 창고로 동창(東倉)과 서창(西倉)이 읍성 안에 있었으며, 서쪽으로 미호천(美湖川) 연변에 신원창(薪院倉)과 금성창(金城倉)이, 북쪽에 북창인 오근창, 동쪽 멀리 청천창(靑川倉), 남쪽 멀리 주안창(周岸倉)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청주목에서 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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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儒學)의 도를 닦는 학자. 청주에서는 1570년(선조 3)에 신항서원이 호서에서 두 번째로 세워질 정도로 사림들이 자리잡혀 갔고 임진왜란 때 청주읍성의 수복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유림(儒林)은 유학의 도(道)를 닦는 학자로써 흔히, 사림(士林)을 일컫는다. 사림이란 용어는 고려말(高麗末)·조선초(朝鮮初)의 시기에도 간혹 쓰였으나, 중종조 무오사화 이후 사화가 거듭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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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에서 조선시대의 교통·통신기관인 역참(驛站)을 관장하던 관리. 역참은 국가의 명령과 공문서의 전달 변경의 중요한 군사정보, 그리고 사신왕래에 따른 영송과 접대를 위하여 마련된 교통·통신기관의 하나로 우역(郵驛)이라고도 한다. 역참은 군사·외교 외에 중앙집권을 유지하기위한 행정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역참의 운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역로의 조직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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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율량동에 있었던 조선시대 교통기관. 역의 기능은 지방통치를 위한 공문서의 전달, 관품 세공의 수송 및 관원사행에 대한 마필의 공급과 숙식제공, 변방군정의 보고 등을 담당하였다. 율량도는 조선시대 41개의 역도의 하나로 조선시대의 역로에서 보면 주요간선의 중간에 해당하는 분로(分路)였다. 이를테면 서울에서 경상도 성주에 이르는 길을 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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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에서 경조사 상호 부조와 친교 등을 목적으로 향촌의 구성원 중 을축년 동갑생들이 모여 만든 갑계. 조선 시대에는 양반 사족과 평민·천민 중에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생들이 모여 친목 모임을 가졌다. 이러한 친목 모임을 ‘갑회(甲會)’ 혹은 ‘갑계(甲契)’라고 하였다. 동갑생들의 갑회는 가장 수평적인 관계에서 친교를 나누며 상부상조의 우의를 다지는 만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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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선조 31)까지 2차에 걸쳐서 조선(朝鮮)에 침입한 왜군(倭軍)과의 전쟁. 1592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조선(朝鮮)에 침입한 왜군(倭軍)과의 전쟁이다. 1차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 부르며, 2차 침입은 정유년에 일어나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 일컫는데 일반적으로 임진왜란이라면 정유재란까지 포함해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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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목(淸州牧)에 속한 향(鄕)의 하나. 주안향(周岸鄕)은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의 청주목(淸州牧)에 속한 향(鄕)으로, 달리 주애(朱崖)라고도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청주의 동남쪽 60리에 있으며, 문의(文義)와 회인(懷仁)을 지나 있다고 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청주목(淸州牧) 방리(坊里)에는 주안면(周岸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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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5년 충청북도 청주 지역 유생들 사이에서 지약해의 후사 문제를 두고 벌어진 향전. 지약해 후사 사건은 숙종(肅宗)[1661~1720] 대 충청도 청주의 유생들 사이에서 벌어진 향전(鄕戰)이다. 정치 세력의 명분 대결 중 첨예한 현안인 예론(禮論)의 적용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사건이다. 청주 지역에는 당시 이색(李穡)[1328~1396], 이이(李珥)[1536~1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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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1930년대 청주의 행정구역. 제2차 갑오개혁에 따라 전국을 23부 337군으로 개편하였는데, 청주는 청주군이라 칭하며 공주부에 속하게 되었다. 제2차 갑오개혁(1894. 12. 17~1895. 7. 7) 때 칙령 98호에 따라 종래의 도(道)·부(府)·목(牧)·군(郡)·현(縣) 등의 행정구역이 폐합되어 전국이 23부 337군으로 개편되었다. 이 때 충청도는 충주부,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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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6년(순조 26)에 청주목에서 일어난 괘서사건(掛書事件). 1826년 3월 16일 청주성 북문에 두장의 괘서(掛書)가 걸린 사건과 같은해 10월 초 청주목 관아에 괘서가 걸린 사건을 말한다. 청주북문 괘서사건은 충청병사 이겸회의 조사로 주모자 김치규(金致奎), 유치중(柳致仲), 이창곤(李昌坤) 등을 체포하고, 안성에 살고 있는 공모자 유성호(柳性浩)를 체포함으로서 일단락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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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949년 청주의 행정구역. 1946년 미군정법령에 따라 청주읍을 부(府)로 승격하고 충청북도의 주·군을 청원군으로 개칭하였다. 1946년 5월 13일 미군정청법령 제84호 지방행정 변경에 따라 6월 1일에 충청북도 청주읍을 부로 승격하고 청주군은 청원군으로 개칭하였다. 이때부터 청주부와 청원군은 독립된 행정구역으로 설정하였다. 청주읍이 청주부로 승격한 지방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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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조헌(趙憲)[1544~1592]의 의병, 영규대사(靈圭大師)[?~1592]의 승병, 박춘무(朴春茂)[1544~1611]의 청주 의병 등이 합군하여 왜군에게 함락 되었던 청주성을 탈환한 전투. 1592년(선조 25) 조선을 침략한 왜군에 의해 청주성이 함락되었다. 이때 옥천에서 일으킨 조헌의 의병과 영규(靈圭)대사가 이끄는 승병 그리고 박춘무의 청주 의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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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 지역에 있던 조선 후기 속오군 편성법에 따른 삼남 방어 체계에서의 주요 군사 기지. 청주진영(淸州鎭營)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대응하기 위하여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도입하는 가운데 설치되었다. 청주진영의 지휘관으로는 영장(營將)을 진영에 파견하느냐 아니면 조선 전기처럼 거진(巨鎭)의 수령이 겸임하느냐를 둘러싸고 여러 논의가 제기되었다. 1654년(효종 5)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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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신하. 충청지역은 조선시대 한성에 도읍한 이후에 많은 사람이 주거하게 되었다. 특히, 수도에서 낙향하거나, 선조의 묘지를 쓰고 집성촌을 형성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은 유교를 숭상하고 충효를 강조하여, 충청지역에서도 충신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 조선 이후에 많이 나타났다. 그런데 청주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죽은 사람은 드물고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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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와 충청남도를 합쳐 부르는 지명. 충주와 청주의 앞 글자를 따서 붙인 지명으로, 1106년(고려 예종 1)에 처음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라 불린 이래 1395년(태조 4) 양광주(楊廣州) 소속 군현을 나누어 경기도라 하고 충청도와 분리하면서 몇 차례의 명칭 변동을 거치며 지금에 이르렀다. 충청도는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하였고 삼국시대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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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 지역에 있던 조선 시대 충청도 내 병력을 최종 지휘하는 군사 지휘 본부. 삼포왜란(三浦倭亂) 이후 16세기 조선에서는 제승방략(制勝方略)의 분군법(分軍法)에 따른 동원 및 방어 체제가 대두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후 진관 조직이 복구되면서 후기의 진관 체제로 변화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은 대(對) 일본 방어 체계에 따른 군사적 대응을 강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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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지리지에 기록된 충청북도 청주 지역의 토산물. 토산물은 한 지역에서 특유하게 생산되는 물건을 일컫는 말이며, 산물(産物)이라고도 한다. 현재 충청북도 청주시의 토산물로는 쌀, 수박, 애호박, 딸기 등이 유명하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의 조선 시대 지리지에도 청주 지역 토산물에 대한 기록이 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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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서 조선 초기 이전의 특수한 지방 하급행정구획. 고려시대에는 군현 밑에 촌과는 별도로 향(鄕)·소(所)·부곡(部曲) 등의 특수 행정조직을 두고 있었다. 부곡과 향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이 거주하였는데 반해 소에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금이나 은, 철, 종이, 먹, 도자기 등을 만들기 위하여 공장(工匠)들을 집단적으로 거주시킨 특수 구역이었다. 먼저 종래의 통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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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선시대 때 지방 행정의 말단 기능을 담당한 계층.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지방관 아래에서 행정실무를 담당하였던 계층이다. 일반적으로 지방관청에 속하여 각 지방의 행정을 맡아 지방사정에 다소 생소한 중앙 파견관리를 보좌하여 실무를 처리하였던 토착적이고 세습적인 하급관리를 말한다. 고려시대에는 장리(長吏), 또는 외리(外吏)라고도 불렸다. 또 행정단위에 따라 주리(州吏), 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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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도지역의 정치, 사상적 흐름을 주도했던 지성인 집단. 사림은 주로 15~16세기에 향촌사회를 중심으로 성리학적 교화와 학문적 심화를 주도했던 핵심세력이었다. 사림은 크게 기호사림과 영남사림으로 분류되어 학맥과 학문 성격이 비교되었고, 아직도 호서사림의 특성이 온전하게 정리되지 못한 아쉬움이 많다. 호서사림은 특히 호란이후 산림인사들의 초치와 북벌론의 강조, 예학의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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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한 정성과 헌신적인 봉사로 시부모를 공경하고 몸가짐을 가지런히 하여 시부모의 뜻을 받드는 며느리. 효는 백행(百行)의 근거이며 만덕(萬德)의 근본이라 하여 전통사회에서는 가장 높은 덕목으로 여겼다. 효를 행함에 있어 하나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효경(孝經)』에서는 “무릇 효(孝)가 덕(德)의 근본이며, 모든 가르침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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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극진하게 잘 섬기는 아들. 왕조사회에서 가정에서의 효도는 국가의 임금님에게 충성하는 데까지 자연스럽게 연장되고, 국왕의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지배 이념으로 보아서 적극 장려되었다. 반대로 불효하거나 역적이 나올 경우에는 유교의 강상(綱常)을 범한 죄과로 간주되어, 그 집안이나, 마을, 또는 고을 전체가 처벌받고, 고을의 지위까지 격하되어 주민들은 약 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