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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3481
한자 鄭淳萬
영어공식명칭 Jeong Sunman
이칭/별칭 왕창동(王昌東)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덕촌리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한애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3년 3월 3일연표보기 - 정순만 출생
수학 시기/일시 1890년 - 정순만 배재학당 수학
활동 시기/일시 1896년 - 정순만 전기 의병과 독립협회 참여
활동 시기/일시 1898년 11월 - 정순만 만민공동회 도총무부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03년 9월 - 정순만 상동청년회 부회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04년 3월 - 정순만 일제 경찰에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06년 - 정순만 청주 덕신학교 설립 발의
활동 시기/일시 1908년 2월 26일 - 정순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조신문』 창간
활동 시기/일시 1909년 - 정순만 공립협회 블라디보스토크 지방회 부회장 역임
몰년 시기/일시 1911년 6월 21일연표보기 - 정순만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6년연표보기 - 정순만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2008년 - 정순만 충북의 역사문화인물 선정
출생지 정순만 출생지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덕촌리지도보기
학교|수학지 정순만 수학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활동지 정순만 활동지 -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룡정시
활동지 정순만 활동지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공립협회 블라디보스토크 지방회 부회장

[정의]

개항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정순만(鄭淳萬)[1873~1911]은 1873년 3월 3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덕촌리에서 태어났다. 1890년 배재학당에서 수학하였고, 1896년 고향인 청주에서 전기 의병에 참여한 뒤 독립협회에서 활동하였다.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 도총무부장으로 활동하며 민중 계몽과 항일 운동에 앞장섰고, 1903년 부회장을 맡아 전덕기(全德基) 목사와 함께 상동청년회 활동을 주도하였다. 1904년 3월에는 적십자사 설립 운동과 보안회 등의 활동을 펼치며 국권을 지키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정순만왕창동(王昌東)이라는 이명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정순만은 1906년 잠시 고향인 옥산면 덕촌리로 돌아와 청주 덕신학교 설립을 발의한 후 이상설(李相卨)·이동녕(李東寧)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중국 연길현 용정촌에 도착하여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운영하다가 이상설이 헤이그특사로 정하여지자 1907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여 이상설을 지원하기 위한 1만 8000원의 의연금을 모금하였다.

정순만은 1908년 2월 26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조신문(海潮新聞)』을 창간하였고, 『대동공보(大東共報)』 주필을 맡아 애국 계몽 및 민족의식을 고취에 힘썼다. 1909년 공립협회 블라디보스토크 지방회 부회장에 선출되었고, 대동공보사를 거점으로 ‘안중근(安重根) 의거’ 계획에 참여한 뒤 안중근의 구명을 위하여 변호사를 선임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1911년 5월에는 홍범도(洪範圖) 등과 함께 국내 진공 작전을 논의하는 등 무장 독립 투쟁론도 견지하였다.

정순만은 1910년 1월 27일 민회장 양성춘(楊成春)을 권총 오발 사고로 사망케 하여 수감되었다가 과실 살상으로 결론이 내려져 1911년 2월 8일 출소하였는데, 양성춘 부인과 형의 보복으로 1911년 6월 21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정순만의 공적을 기려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정순만은 2008년 충북의 역사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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