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4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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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有興 |
영어공식명칭 | Jeong Yuheung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주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한애라 |
출생 시기/일시 | 1901년 10월 15일 - 정유흥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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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19년 - 정유흥 청주공립농업학교 입학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0일 - 정유흥 청주 3·1운동 모의 가담하여 일제 경찰에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31일 - 정유흥 공주지방법원 청주지검에서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 |
수학 시기/일시 | 1957년 - 정유흥 청주공립농업학교 명예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57년 - 정유흥 청주농업고등학교로부터 명예 졸업장 수령 |
추모 시기/일시 | 2022년 - 정유흥 대통령표창 추서 |
출생지 | 정유흥 출생지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사천동 |
학교|수학지 | 정유흥 수학지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덕로 45[내덕동 322] |
활동지 | 정유흥 활동지 - 충청북도 청주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정유흥(鄭有興)[1901~?]은 1901년 10월 15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사천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지금의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 출신인 신영호(申鍈浩)는 3·1운동 당시 경성 중앙학교에 재학 중이었는데, 만세 시위로 휴교령이 떨어지자 ‘경고아이천만동포(警告我二千萬同胞)’라는 제목의 문건을 입수하여 청주로 귀향하였다. 신영호는 3월 9일 아침에 청주공립농업학교 기숙사로 가서 학생들에게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 상황을 알리며 청주에서도 시위를 전개하자고 제안하였다. 이에 정유흥을 비롯한 청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은 3월 11일 만세 시위를 거행하기로 결의하고 청수정[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에 있던 1학년 김흥배(金興培)의 본가에서 군중에게 배포할 경고문 300여 부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그려 준비하였다. 다음날인 3월 10일 2학년생 31명이 시험 연기원서를 학교에 제출하고 1학년생 15명이 비밀리에 기숙사를 탈출하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학교 측과 일제 경찰의 대대적인 수색이 진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경고문과 태극기가 발각되어 거사 모의에 가담한 학생들이 모두 검거되었다.
정유흥 등 1학년생들은 1919년 3월 31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검에서 불기소 처분이 내려져 석방되었고, 오석영 등 2학년생들은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시위를 모의한 학생들은 모두 퇴학 처분을 받았고, 1957년 개교 45주년을 맞이하여 청주농업고등학교로부터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정유흥의 공적을 기려 202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