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4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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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光弼 |
영어공식명칭 | Beak Gwangpil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화하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욱재 |
출생 시기/일시 | 1899년 5월 2일 - 백광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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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 백광필 『자유민보』 발간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5월 26일 - 백광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 언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8월 28일 - 백광필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으로 징역 3년형 확정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2월 17일 - 백광필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 |
추모 시기/일시 | 2018년 11월 17일 - 백광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백광필 출생지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화하리 |
거주|이주지 | 백광필 거주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백광필(白光弼)[1899~?]은 1899년 5월 2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화하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백광필은 조선 독립 문제에 관한 여론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고, 3월 말 최석인(崔碩寅)·류연화(柳淵和) 등과 함께 훈정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자신의 거처에서 조선은 일본 통치하에서 벗어나서 완전한 독립국이 되어야 한다는 취지의 경고문 약 300장을 인쇄하여 동대문 부근 민가에 뿌렸다.
백광필은 이후 최석인 등과 함께 『자유민보』라는 이름으로 저작물 출판을 준비하며 류연화에게서 출판 자금 30원을 받았다. 류연화는 논설을, 최석인은 기타 기사를 쓰기로 하였다. 이후 해당 관서의 허가 없이 4월 1일부터 ‘민족 자결주의에 따라 조선은 독립해야만 한다’는 취지의 논설을 게재하며 1호부터 5호까지 약 1,000장을 인쇄하여 광화문 및 동대문 부근 민가에 배포하였다.
백광필은 『자유민보』를 인쇄하고 배포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1919년 5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9년 7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었고, 1919년 8월 28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으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2월 17일 출소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백광필의 공적을 기려 2018년 11월 17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