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4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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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聖休 |
영어공식명칭 | Shin Seonghyu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미원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욱재 |
출생 시기/일시 | 1891년 8월 16일 - 신성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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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30일 - 신성휴 청주 미원리 쌀안장터 만세 시위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5월 5일 - 신성휴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6월형 언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8월 16일 - 신성휴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상고 기각으로 징역 6월형 확정 |
몰년 시기/일시 | 1955년 3월 20일 - 신성휴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2년 4월 13일 - 신성휴 대통령표창 추서 |
출생지 | 신성휴 출생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 |
활동지 | 신성휴 활동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미원리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신성휴(申聖休)[1891~1955]는 1891년 8월 16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하자 청주 지역에서도 독립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1919년 3월 30일 오후 2시 무렵 미원면 미원리[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미원리] 쌀안장터 사거리에서 100여 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고, 신성휴는 신경구(申敬求)·이수란(李水蘭)·이용실(李容實) 등과 함께 앞장서서 시위를 이끌었다. 주변에 있던 주민과 장꾼들이 합류하여 시위 대열은 순식간에 1,000여 명으로 불어났고, 출동한 일제 경찰이 주동자 신경구를 체포하여 연행하자 시위 군중은 주재소 앞으로 이동하여 신경구의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일제 경찰의 위협에 돌을 던지며 맞서던 시위대가 주재조 안으로 진입하려 하자 경찰은 실탄을 발사하여 장일환(張一煥)과 이병선(李炳善)을 살해하였고, 곧이어 도착한 응원 병력이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신성휴는 시위 중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1919년 5월 5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및 소요 혐의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항소하여 1919년 6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치안 방해 공소 사실에 대하여서는 무죄가 선고되었으나 1심 형량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1919년 8월 16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상고 기각으로 징역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신성휴는 1955년 3월 20일 사망하였다.
[묘소]
신성휴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신성휴의 공적을 기려 1995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