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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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烽燧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효진 |
[정의]
충청북도 청주 지역에서 긴급한 군사 정보를 중앙에 전달하던 조선 시대 통신 시설.
[개설]
봉수(烽燧)란 변경과 지방의 군사 정보를 중앙에 신속히 전달하기 위하여 운용한 통신 시설의 하나였다.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로 신호를 보냈다. 산정(山頂), 즉 산의 정상에 봉수 시설을 마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각종 문헌에 따르면 일찍이 삼국 시대부터 봉수제가 운용되었던 것으로 파악되는데, 자세한 운영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고려 시대부터였다. 현재 남아 있는 자료는 대부분 조선 시대 봉수로, 조선 시대 봉수제를 통하여 이전의 모습을 짐작하고 있다. 조선 시대 봉수제는 세종(世宗) 대[1418~1450]에 본격적으로 정비되었다. 세종 대에는 봉수제와 관련한 제반 규정을 정비하였고, 연변봉수(沿邊烽燧)의 연대(烟臺)를 축조하고, 봉수망(烽燧網)을 획정하는 등 시설과 운용의 체제를 온전히 갖추었다. 조선 시대 봉수는 연변봉수, 내지봉수(內地烽燧), 경봉수(京烽燧) 등으로 구분되었는데, 변경에서 중앙까지의 5개의 직봉(直烽) 노선과 직봉으로 합류하는 간봉(間烽) 노선이 있었다. 청주 지역의 봉수도 세종 대에 본격적으로 정비되었는데, 내지봉수에 속하고, 간봉 노선과 관련되었다. 청주 지역의 봉수의 명칭과 소재지에 대해서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를 통하여 살필 수 있다. 이후 『경국대전(經國大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및 조선 후기의 각종 지리지와 지방지 등에서도 청주 지역의 봉수에 대한 내용을 전하고 있어 대략적이나마 운용과 변화를 살필 수 있다. 조선의 봉수제는 1894년 폐지되었다.
[것대산 봉수와 저산역 봉수]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청주목(淸州牧)에 2개의 봉수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로 것대[居次大] 봉수와 저산역(猪山驛) 성산(城山) 봉수이다. 것대 봉수는 청주목 치소의 동쪽에 있는데, 남쪽으로 문의(文義) 소이산(所伊山)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진천(鎭川) 소을산(所乙山)에 호응한다고 하였다. 저산역 성산 봉수는 청주목 치소 서쪽에 있는데, 서쪽으로 연기(燕岐) 용수산(龍帥山)에 호응한다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청주목 조에는 것대산 봉수만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것대산 봉수는 치소의 동쪽 11리[4.32㎞]에 있었다고 하였다. 것대산 봉수는 간봉 9와 이어졌다. 간봉 9는 남해(南海) 금산(錦山)에서 시작하여 회덕(懷德) 계족산(鷄足山)-청주 것대산-진천 소을산을 거쳐 충주 망이성(望夷城)으로 이어졌고, 충주 망이성 봉수는 충청북도 지역의 주요 봉수를 전달받아 경기도 안성을 거쳐 중앙으로 보냈다. 청주 지역의 것대산 봉수는 남해에서 충주와 서울로 이어지던 봉수로에 있었던 것이다. 저산역의 성산 봉수는 『세종실록지리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데, 저산역은 저산 아래에 있었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