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3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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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孝婦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민식 |
[정의]
충청북도 청주 지역의 기혼 여성이 시부모에 대한 효행으로 기록된 청주의 여성.
[개설]
전통 시대 여성의 가치는 부모에게 효를 다한 효녀(孝女)와 시부모에 대한 효를 실천한 효부(孝婦), 남편에 대한 정절을 지킨 열녀(烈女)로 대변된다. 이 중 효부에 대한 공인은 시댁의 명예와 권위를 유지할 수 있는 장치였다. 삼국 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관찬 사서를 비롯한 지리지와 읍지에는 별도의 항목으로 효부를 나누고 있다. 시중에 판매하기 위하여 다수의 인물을 수록하고 청주군과 문의군이 합쳐진 이후의 사실을 기록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청주군 효부 조를 통하여 정주 지역 효부의 실상을 살필 수 있다.
[『조선환여승람』 효부 조]
정의창(鄭儀昌)의 처 인천 채씨(仁川 蔡氏) 는 시아버지의 병에 단지(斷指)하고 시어머니께 젖을 먹여 봉양하여 영조 때 정려되었다. 이지훈(李之薰)의 처 김씨(金氏)는 남편이 사망한 뒤에도 시아버지를 극진하게 모셔 복호되었다.
정익후(鄭翊後)의 처 경주 이씨(慶州 李氏)는 시부모를 지극한 정성으로 모셔 ‘여중군자(女中君子)’라는 칭송을 받았다. 오진환(吳震煥)의 처 전주 이씨(全州 李氏)는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집안의 화목에 힘써 계모조차 효행을 칭찬하니 사람들이 ‘규방의 범절’이라 칭송하였다.
보성 오연영(吳淵英)의 처 현풍 곽씨(玄風 郭氏)는 병든 시어머니를 수족처럼 5년을 봉양하니 주변의 추천으로 포상을 받았다. 오연영(吳淵盈)의 처 은진 송씨(恩津 宋氏)는 남편이 사망한 후 시아버지에게 효도를 다하고 일곱 살 아들을 제대로 가르쳐 고을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오상세(吳相世)의 처 밀양 박씨(密陽 朴氏)는 시어머니를 10년 동안 극진히 봉양하고 어김이 없었으니 고을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보성 오연후(吳淵後)의 처 진주 류씨(晉州 柳氏)는 집안이 가난하여 봉양이 쉽지 않자 부지런히 옷감을 짓고 부족한 음식이라도 정성껏 마련하여 봉양하였고, 시어머니가 병들자 몸소 수발을 들어 고을의 칭찬을 받았다.
조종학(趙鍾學)의 처 보성 오씨(寶城 吳氏)는 시어머니에게 효도를 다하고 남편이 병들자 단지하였고, 대변을 맛보아 시어머니의 병세를 살피는 등 효행과 절개로 칭찬받았다. 오영세(吳檸世)의 처 단양 우씨(丹陽 禹氏)는 시어머니를 정성으로 봉양하였는데, 시어머니가 창증(脹症)으로 3년을 고생하니 대변을 맛보아 병세를 살피며 정성으로 간호하여 고을에서 효부라고 칭송하였다.
오창수(吳昌秀)의 처 죽산 안씨(竹山 安氏)는 시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였고, 남편이 병들자 대신 죽게 하여 달라 빌었다. 남편이 사망하자 정성을 다하여 상을 치렀고, 시아버지의 상에도 정성을 다하여 사림이 포상하고자 완문을 만들었다. 이건현(李建賢)의 처 허씨(許氏)는 시아버지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고영돈(高永敦)의 처 인동 장씨(仁同 張氏)는 시어머니 봉양에 정성을 다하였고 시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자 부부가 하늘에 빌고 정성껏 구호하였다. 시어머니가 사망하자 슬퍼함이 지나쳐 몸이 상할 정도였으며 예법대로 삼년상을 치러 관아에서 포상하였다. 오규선(吳圭善)의 처 영산 신씨(靈山 辛氏)는 시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였는데, 불이 나서 시아버지가 온몸에 상처를 입자 매일 서너 번씩 상처의 고름을 빨아내어 효험을 보았다. 시아버지가 사망하자 몸이 상할 정도로 슬퍼하고 삼년상을 마쳐 명륜회에서 술잔 한 쌍과 포창문을 내렸다.
정의창의 처 인천 채씨 와 이지훈의 처 김씨의 일화는 『여지도서(輿地圖書)』에도 실려 있다. 『조선환여승람』 효부 조에 수록된 청주 지역 효부는 모두 14명인데, 이 중 효부 정려가 내려진 사람은 인천 채씨가 유일하다. 그렇지만 현재 청주에는 효부로 명정되어 정려가 남아 있는 사례가 여럿 있다.
[현존하는 효부각]
인천 채씨 효부각은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화창리에 있는데, 1729년(영조 5)에 명정되고 1896년 중건하였다. 연일 정씨 효부문은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에 있는데, 연일 정씨는 송명휘(宋明輝)의 처로 1841년(헌종 7)에 명정되었다. 청주시 상당구 탑동에 효부각이 있는 인천 이씨는 남편 곽진은(郭鎭殷)과 함께 같은 정려에 편액이 걸려 있는데, 1850년(철종 1)에 명정되었다.
안동 김씨 효부각은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선암리에 있는데, 안동 김씨는 임시대(任時大)[1758~1816]의 처로 1887년(고종 24) 명정되었다.
경주 이씨 효부각은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신대리에 있는데, 경주 이씨는 임노훈(林魯訓)의 처로 1933년 명정되었다. 용인 이씨 효부각은 1870년(고종 7)에 명정되었는데, 대청댐 건설로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가호리 184로 이전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찾을 수 없다. 용인 이씨 효부각을 현재 찾아볼 수 없어서 청주 지역에는 효부각 5개소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