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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약해 후사 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3133
한자 池若海 後嗣 事件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한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70년 - 청주 신항서원 건립
발생|시작 시기/일시 1675년연표보기 - 지약해 후사 사건 발생
종결 시기/일시 1680년연표보기 - 지약해 후사 사건 종결
발생|시작 장소 신항서원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이정골로 115-8[용정동 120]지도보기
성격 향전
관련 인물/단체 지약해|지봉익|지응구|지응삼

[정의]

1675년 충청북도 청주 지역 유생들 사이에서 지약해의 후사 문제를 두고 벌어진 향전.

[개설]

지약해 후사 사건 은 숙종(肅宗)[1661~1720] 대 충청도 청주의 유생들 사이에서 벌어진 향전(鄕戰)이다. 정치 세력의 명분 대결 중 첨예한 현안인 예론(禮論)의 적용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사건이다. 청주 지역에는 당시 이색(李穡)[1328~1396], 이이(李珥)[1536~1584] 등 9명이 제향된 신항서원(薪巷書院)밖에 없었다. 신항서원은 1570년(선조 3)에 건립되고 1660년(현종 1) 사액된 서원이었다. 신항서원을 주도하고 당시 향론(鄕論)을 주도하던 세력은 남인계 유생들이었다. 청주 지역 서인계 및 남인계 유생들 간에 생긴 갈등의 단초는 예송(禮訟)에서의 복제 논쟁(服制 論爭)을 거치는 과정에서 서인과 남인 세력 사이에 당론(黨論)으로 정한 의례 문제(儀禮 問題)의 적용에 대한 대립에서부터였다. 청주 지역의 서인 출신 지약해(池若海)[1582~?]는 후사가 없어 같은 문중 사람인 지봉익(池鳳翼)[1609~1664]을 후사로 삼았다가 문제가 있어 파기하였다. 이를 기화로 하여 청주의 남인 유생들이 지봉익과 두 아들 지응구(池應九)[?~1682], 지응삼(池應三)의 이름을 신항서원의 유적(儒籍)에서 삭제하였다.

[역사적 배경]

16세기까지 사족 기반을 공유하고 있었던 청주 지역의 여러 성씨들은 1656년(효종 7)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문인이자 외족(外族)인 지약해의 건의로 청주 대표 서원인 신항서원이이이색이 추향되면서 대립의 조짐을 보였다. 당시의 대립은 서인과 남인의 갈등 문제도 포함하고 있었다. 1665년(현종 6) 신항사원 사우를 새로 지으면서 송시열의 주도로 이이가 주향(主享)으로 정하여졌다. 반면 신항서원 창건 당시 제향되었던 청주 지역 세거 성씨의 현조 경연(慶延)[?~?]·김정(金淨)[1486~1521]·박훈(朴薰)[1484~1540]·송인수(宋麟壽)[1499~1547]·한충(韓忠)[1486~1521]·송상현(宋象賢)[1551~1592]·이색·이득윤(李得胤)[1553~1630]은 병향(幷享)으로 위차가 조정되었다. 세거 성씨 현조의 위차 조정은 이후 청주 지역의 각 성씨와 사족 간 갈등의 쟁단이 되었다.

[경과]

1675년(숙종 원년) 2차 예송 논쟁이 있었고, 송시열이 귀양을 가면서 청주 지역의 반노론계 사족들은 송시열을 두고 불만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청주 지역에서는 서인계와 남인계 유생들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청주 지역 유생 간 갈등의 단초는 복제 논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의례 문제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두고 발생하였다. 청주 지역의 서인 출신 지약해는 후사가 없어 같은 문중의 지봉익을 후사로 삼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뒤에 족보를 통하여 알아보니 지약해와 지봉해는 족형제간(族兄弟間)이었다. 후사를 삼을 때는 문중에서 조카 관계에 있는 사람을 후사로 삼는데, 지봉익은 족보에서 조카가 아니라 형제 관계로 드러난 것이다. 지봉익이 뒤늦게 알고 후사를 파기하려 하였으나 양어머니인 유씨(柳氏)의 반대로 실현하지 못하였다. 지봉익은 사망하기 전 아들인 지응구에게 유언을 남겨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였다. 지응구는 윤선거(尹宣擧)[1610~1669]·송시열·송준길(宋浚吉)[1606~1672] 등에게 자문을 구하여 계파귀종(繼罷歸宗), 즉 지봉익이 후계가 된 일을 파하고 원래의 문중 족보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답을 얻었다. 그리하여 유씨를 설득하고 예조(禮曹)에 보고하여 후사를 파기할 수 있게 되었다. 지약해의 부인 유씨는 지봉익의 다른 아들 지응삼을 후사로 삼았는데, 지응삼은 문중의 다른 지씨 일가에 출계하였다가 파기된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청주의 남인계 유생인 조익관(趙益寬), 권대하(權大夏) 등은 지약해 후사 사건을 지켜보고 지씨 문중이 계파귀종(繼罷歸宗)으로 입후(入後) 문제를 바로잡았다고 하더라도 친아버지와 양아버지의 상을 당하고서 3년상을 치르지 않은 것을 문제로 삼았다. 그리하여 지봉익과 지봉익의 두 아들인 지응구·지응삼을 서원 유적에서 삭제하였다. 이에 대하여 노론계도 지약해의 사돈이자 송시열의 내족(內族)인 송국사(宋國士)[1612~1690] 등이 태학(太學)에 통문을 보내어 조익관 등을 유적에서 삭제하였다. 당시 신항서원 원장이었던 송시열은 지봉익을 서원 유적에 다시 등재하여 복권하려 하였다. 그러나 신항서원 유생 중에 조익관의 세력이 많아 송시열의 말을 따르지 않았고 결국 지봉익을 유적에 등재할 수 없었다.

[결과]

서인 세력에서는 회덕을 포함한 청주 유생들의 대립을 남인계 유생이 지약해에 대하여 가진 사감(私感) 때문으로 평가하였다. 그러한 사감은 신항서원에서의 제향 위차 문제로 발생된 갈등과 연관되어 있었다. 즉, 신항서원이 건립될 당시에는 김정·송인수·경연·박훈 등을 제향하였으나 뒤에 한충·송상현·이득윤 등을 추가로 제향하였다. 그런데 1656년 신항서원을 개수하면서 이이·이색을 추향하였다. 서원에서는 이이·이색의 위차를 바로 주향으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에는 서인계 인물인 지약해송시열과의 관계 속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약해 등은 이이를 동벽에 제향하고, 이색을 서벽에 제향하여 남인계 유생의 반발을 무마하려 하였으나 유생들 사이에서는 적지 않은 갈등이 빚어졌다. 이후 송시열·송준길 등이 개입하여 제향 인물들을 병향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위차를 둘러싼 유생 간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의의와 평가]

지약해 후사 사건 의 이면에는 청주 지역에서 서인계와 남인계 유생들의 갈등이 내재되어 있었으며, 신항서원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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