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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병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3131
한자 忠淸兵營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관부(전통 시대)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한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이전 시기/일시 1651년 - 충청병영 충청도 해미현에서 충청도 청주목으로 이설

[정의]

충청북도 청주 지역에 있던 조선 시대 충청도 내 병력을 최종 지휘하는 군사 지휘 본부.

[설립 경위 및 목적]

삼포왜란(三浦倭亂) 이후 16세기 조선에서는 제승방략(制勝方略)의 분군법(分軍法)에 따른 동원 및 방어 체제가 대두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후 진관 조직이 복구되면서 후기의 진관 체제로 변화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은 대(對) 일본 방어 체계에 따른 군사적 대응을 강화하였고, 이에 따라 삼수병(三手兵)의 양성과 속오법(束伍法)의 편제 방침이 마련되었으며, 중앙에서는 훈련도감(訓鍊都監), 지방군에서는 속오군(束伍軍)이 구성되었다.

본래 충청병영(忠淸兵營)은 고려 시대 이래 충청도 해미현(海美縣)에 설치되어 있었으나, 16~17세기 사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이 잇달아 발발하자 조정에서는 충청병영충청도 청주목(淸州牧)으로 이전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조선 전기에 충청병영이 해미현에 설치되었던 이유는 하삼도, 즉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의 해안 방어를 위함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전체 방어 전략은 도성 방어와 내륙 방어에 무게를 두게 되었다. 충청도는 남쪽의 일본군이 침략할 경우 도성으로 올라오는 내륙의 길목이었고, 도성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다. 그러한 군사적·지리적 중요성으로 인하여 충청도 지방군의 지휘 체계 및 편성은 내륙 방어를 강화하고 도성을 지원하는 쪽으로 개편되었다. 이에 따라 호서(湖西)와 영남(嶺南)의 교차점에 있었던 청주목에 수도인 한성(漢城)을 방어하기 위하여 병영을 설치하여야 한다는 논의가 제기된 것이다. 그 결과 충청도 54개 고을의 육군을 총괄하는 충청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주둔지인 충청병영이 1651년(효종 2) 충청도 해미현에서 충청도 청주목으로 이전하였다.

[조직 및 담당 직무]

조선 후기 충청도의 지방군은 속오군으로 조직되었다. 1765년(영조 41) 조사한 바에 따르면 충청병영 소속 군사는 3,397명이었다. 이에 감영 소속 군역 총수 5,860명, 5군영 총수 2만 1655명, 수영(水營) 소속 5,359명을 합하면 3만 6271명이라는 18세기 후반의 충청도 지방군의 총수를 파악할 수 있다. 여기서 병영 소속의 군사는 충청도 지방군 총수에서 약 9%를 차지하였다.

1651년 충청병영이 충청도 해미현에서 충청도 청주목으로 이설함에 따라 충청도의 방어 체제와 지휘 체계는 일정 부분 변경되었다. 공주감영과 청주병영 2개의 주진 아래 전영 홍주군, 좌영 해미현, 중영 청주목, 우영 공주목, 후영 충주목 등 5진영의 방위 체제가 구축되었으며, 충청병영[병사]-5진영[영장]-54개 속읍[각읍 수령]으로 이어지는 지휘 체계가 확립되었다.

청주에는 충청병영과 중영인 청주진영이 함께 설치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청주는 조선 전체의 방어 체계에서 중심부로 부상하였다. 충청병영이 청주로 이전된 뒤에도 1718년(숙종 44) 태안군수 안서우가 상소하여 청주와 충주 중 한 곳을 택하여 육군통제사를 두어 별영을 지휘하게 하자는 주장을 하였다. 그만큼 청주가 지닌 주요 방어 거점의 성격이 중대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청주에 충청병영과 중영을 설치한 것이 도성 방어에 큰 역할을 하였다. 1728년(영조 4) 무신란이 일어났을 때 경상도의 반란군이 청주와 진천을 거쳐 북상하려 하였으나, 청주를 방어하는 병영군·진영군의 완강한 저지로 무신란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관련 기록]

충청병영 에 관한 기록으로는 『효종실록(孝宗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여지도서(輿地圖書)』, 『광여도(廣輿圖)』,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등이 있다. 『효종실록(孝宗實錄)』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김육이 아뢰기를 “호서와 영남 사이에 토적(土賊)이 아주 치성하여 여기저기 출몰하면서 도적질하는데, 도당이 자못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호서의 병사와 수사가 모두 해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식자들이 혹 청주에다 병영을 설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이는 대개 청주가 호서와 영남의 교차점에 있어서 제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 홍전(洪瑑)은 본디 재주와 국량이 있으니, 병영을 옮기고 홍전을 병사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솔히 변통할 수 없다. 비국의 여러 신하들과 서로 의논하여 다시 품의하라” 하였다[『효종실록(孝宗實錄)』 권7, 효종 2년(1651) 11월 정해(13일)]

위의 자료에서는 충청도와 영남 사이에 도적이 출몰하고 있고 이를 내륙에서 제어하기 위하여 영의정 김육이 청주에 병영을 설치하여야 한다고 건의하고 있다. 이러한 건의는 충청도 지역에서 청주가 군사 요지로 지목되고, 그에 따라 충청병영을 이전하여야 한다는 논의가 계속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변천]

충청도 병마절도사의 주둔지인 충청병영청주목으로 옮겨지면서 청주목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청주목사가 정3품 품계를 가진 음직(陰職) 관원인데 비하여 충청병사는 이보다 한 등급 높은 종2품의 품계를 가진 무관(武官)이 임명되었고, 청주읍성은 동시에 병영성(兵營城)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에 상당산성(上黨山城)이 병영 소속으로 운영되었고, 병영이 이동된 지 3년 후인 1655년(효종 6)에는 옥천군에 있던 중영(中營)이 청주목으로 이동하였다.

[의의와 평가]

충청병영 청주진영과 함께 충청도와 도성의 방어 체계에서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18~19세기에는 주민 통제 및 체제 유지를 위한 기구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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