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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0475
한자 儒林
영어음역 Yurim
영어의미역 the Confucian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양수

[정의]

유학(儒學)의 도를 닦는 학자.

[개설]

청주에서는 1570년(선조 3)에 신항서원이 호서에서 두 번째로 세워질 정도로 사림들이 자리잡혀 갔고 임진왜란 때 청주읍성의 수복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연원]

유림(儒林)은 유학의 도(道)를 닦는 학자로써 흔히, 사림(士林)을 일컫는다. 사림이란 용어는 고려말(高麗末)·조선초(朝鮮初)의 시기에도 간혹 쓰였으나, 중종조 무오사화 이후 사화가 거듭되는 동안에 피화자의 집단성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화(士禍)가 발생하여 그 세력이 크게 제거되었지만, 중종대에 다시 정계에 진출하여 조광조(趙光祖)[1482~1519]를 중심으로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사림은 정치과정에 참여주체로서의 기능을 갖고, 민중의 요구를 정치과정에 투입시키기도 하였다.

[변천]

1. 15세기의 청주지역 유림

청주지방은 조선 초기 다른 지역에 비해 명문거족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이 시기 청주에는 왕실의 통혼 대상으로 선정되어 재상지종(宰相之宗)으로까지 꼽힌 청주한씨(淸州韓氏), 청주이씨 등을 비롯 경씨, 곽씨(郭氏), 정씨 등 쟁쟁한 일급 거족들이 할거하고 있었다.

이 시기 청주지역의 학문 활동은 정부의 유학진흥책과도 관련하여, 향교에서의 유생 양성은 이를 제도적으로 밑받침하였다. 이 시기 청주 지역의 유생들의 학문 내용은 이색(李穡)[1328~1396], 권근(權近)의 학문과 어느 정도 연관되어 있었다.

2. 16세기 청주 지역 유림

신항서원(莘巷書院)은 16세기 후반에 건립되었는데, 처음 유정서원(有定書院)으로 창건되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를 주향(主享)하고 이색, 한충, 송인수(宋麟壽)[1487~1547]와 같은 인물들을 배향하여 이 지역 출신 인물들의 학문적 업적을 기렸는데, 율곡(栗谷) 이이의 학문을 중심으로 청주 지역 사림을 계통화하려 하였다. 이 시기 청주 지역 유생의 활동은 성리학적인 기조 위에서 문장과 공업을 중시하였다.

이이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 학문의 계통화 작업은 양반 사대부의 분열과 대립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황 속에서 청주와 호서지역의 학문적,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자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결국 이후의 전일적 도통주의적 주자학에 기초한 정국운영, 사회운영의 토대를 마련한 셈이었다. 이들의 학풍은 기호학파의 사상, 노론의 정치이념으로 구체화되고, 17세기에 송시열의 화양서원, 만동묘로 계승되었다.

3. 17~18세기 청주지역의 유림

붕당간의 대립이 치열했던 중앙정계의 영향 아래 17세기에서 18세기에는 정권의 향방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였다. 청주 지역의 경우는 이때에 노론의 영향력이 아주 강했던 곳으로서 중앙정계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화양서원은 건립주체자인 권상하(權尙夏)를 중심으로 스승 송시열의 배향을 통해 이 지역 사림의 공론을 불러일으켰고 여론 조성을 했던 집권당 노론의 구심점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노론의 집권기에 『화양연원록(華陽淵源錄)』에 보이는 유림들의 중앙 진출은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그러한 학통과 인맥을 갖지 않은 자들은 반노론 세력으로 결집되는 가운데 반체제적인 민중세력과 결합될 가능성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모순의 응결형태가 18세기 초 영조(英祖)대 무신란(戊申亂)으로 폭발했다. 그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청주 지역의 사회경제 배경과 정치계의 동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한 가운데 반체제적인 민중과의 결합이 병란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역사적 관련사항]

서원의 변질과 폐해(弊害) :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서원은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선현 봉사에만 치우치고 당쟁의 근원지로 변질되어 갔다. 한 예로 화양서원(華陽書院)은 소위 화양묵패(華陽墨牌)로서 극에 이른다. 만약에 불응(不應)하면 서원 뜰로 잡혀가서 잘못하면 사형까지 당했으며 수령(守令)도 두려워했다고 하니 화양묵패(華陽墨牌)는 협박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후 지방에서 서원(書院)과 향약을 토대로 기반을 강화하는 데 주력하다가, 16세기 후반 선조(宣祖)의 즉위를 계기로 척신정치가 일단 종식되면서 중앙에 활발하게 진출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후에 사림은 남인과 북인,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현황]

청주향교는 1977년에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조선시대 이후 유교문화의 본산으로서 지금도 한문과 서예 등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신항서원은 2001년에 보수하였고, 강당과 삼문, 행랑, 청주 신항서원 묘정비가 세워져 있다. 조선 중기 이후 운곡서원, 구계서원(龜溪書院), 송계서원(松溪書院)이 세워진 후 치폐를 겪었다.

[의의와 평가]

충청북도에서는 조헌(趙憲)[1544~1592]·영규대사(靈圭大師)[?~1592] 등 의병장·승장들이 나와 의병활동을 전개하여 전국에서 첫 번째로 왜군에 점령 당한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향촌사회에서 학덕을 갖춘 명망 있는 인사들이 앞장서 창의(倡義) 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을미의병(乙未義兵)이 일어난 뒤 3·1운동에 파리 장서사건(長書事件)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영문본문]

The Hwayang Seowon (Confucian Shrine/Academy) was established in 1696 to hold memorial service in honor of Song Si-yeol. Because its name was coined by the king and a signboard written in the king’s own hand was hung there in 1716, Hwayang Seowon became a powerful center of learning, attracting a great number of students. Kwon Sang-ha built a shrine with spirit tablets of King Shinjong and King Uijong of the Ming China, who sent troops to aid Korea during the 1592 Japanese Invasion, in the seowon compound, as instructed by Song’s will.

(출처 : 국립청주박물관 홈페이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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