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3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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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湖西士林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민식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에 세거하며 향론을 주도하였던 집단.
[개설]
사림(士林)은 15~16세기 사화(士禍)를 겪으며 주도 세력으로 성장한 양반 집단을 말한다. 이들은 고려 말 조선 초기의 왕조 교체기에 낙향하여 정착하거나 훈구(勳舊)의 형성 과정에서 이탈한 세력, 그리고 사화를 피하여 향촌에 정착하였고, 사화기와 붕당기를 거치며 점차 정치 세력화하였다.
[청주 사림의 연원]
초기 사림으로 청주 지역에 자리 잡은 경우로 (구)안동 김씨는 김사렴(金士廉)[?~?]이 조선 건국 후 오창에 은거하면서 비롯하였고, 전주 최씨는 중시조 최순작(崔純爵)이 일찍이 터전을 마련한 후 6세손 최득평(崔得枰)[1260~1334]이 청주 곽씨 곽예(郭預)의 사위가 되면서 처향인 북이면 대율리로 입향하였다. 의성 김씨는 김담(金澹)이 조선 초 부인 보성 오씨의 고향으로 들어오면서 세거가 시작되었고, 문화 류씨는 류소(柳沼)가 은퇴 후 부인 안동 김씨의 고향으로 들어왔다. 전의 이씨는 이정간(李貞幹)[1360~1439]의 여동생이 청주 곽씨에게 시집가고 아들이 안동 김씨와 혼인하면서 청주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후 12세손 이사혜(李士惠)의 후손들이 외손봉사를 이으며 정착하였다. 보성 오씨는 오숙동(吳叔同)이 처향인 현도면 양지리로 들어오며 후손들이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성씨들은 처향이나 외향(外鄕)으로 들어온 경우가 대부분으로, 초기 청주 지역의 세거 성씨를 이룬다.
훈구 또는 훈척(勳戚)이라 불리는 공신의 후예들은 지역에 장원을 마련하면서 후손들이 세거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인동 장씨 장덕생(張德生)은 남일면 가산리에 터전을 잡았고, 현풍 곽씨 곽성(郭惺)은 계유정란 후 오송읍 연제리로 들어왔다. 진주 류씨 류종식(柳宗植)은 정난좌익공신으로 만년을 현도면 노산리에서 보내며 후손들이 세거하기 시작하였고, 충주 지씨 지계한(池繼漢)[?~1477]은 성종 때 남일면 은행리로 낙향하였다. 진주 강씨 강희명(姜希明)[1427~1489]은 1460년(세조 6) 청주 화계리로 낙향하였다. 진양 하씨는 하세련(河世漣)이 문의에 은거한 후 세거가 시작되었고, 안정 나씨 나유선(羅裕善)은 부인 파평 윤씨가 친정에서 상속받은 북이면 선암리에 정착하였다. 함양 박씨 박숭탕(朴崇湯)[1411~1478]은 충청도도사를 지낸 연유로 미원면 금관리에 입향하였고, 순천 박씨 박의륜(朴宜倫)은 단종 복위로 화를 당한 후 강서 송곡(松谷)으로 들어왔다. (신)안동 김씨 김백희(金伯喜)[1456~1490]는 부인 상당 양씨와 청주로 입향하였고, 전주 이씨의 여러 계파는 계유정난·단종 복위 사건·연산군 폭정 등 다양한 배경 아래 청주에 정착하였다. 교하 노씨 노유근(盧有謹)은 계유정난을 피하여 아버지 노식(盧湜)을 모시고 처가로 낙향하였다.
조선 초부터 다양한 경로로 청주 지역에 입향하거나 예부터 터를 잡고 있던 양반 가문은 이후 사화로 낙향한 인물 또는 관직 생활에서 좌절을 겪고 낙향한 인사들과 혼맥을 이루며 점차 사림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청주 사림의 성장]
이러한 초기 정착 성씨 집단을 기반으로 사화를 거치며 유력 인물들이 대거 청주로 들어오면서 비로소 사림의 득세가 시작되었다. 청풍 김씨 김윤(金潤)[1489~1506]은 연산군 때 집안이 기울자 진외가인 전의 이씨 집안으로 들어왔고, 아들 김숭의(金崇義)는 채무이(蔡無易)를 사위로 맞으며 인천 채씨의 청주 세거가 시작되었다. 전의 이씨, 청풍 김씨, 인천 채씨는 청주 지역을 대표하는 서인계 사족으로 성장하였다. 파평 윤씨 윤형(尹炯)[1394~1455]은 청주 곽씨에게 장가들며 후손들이 청주에 정착하였고, 윤사석(尹師晳)은 연산군 폭정을 피하여 옥화대로 낙향하였다. 경주 이씨 이공린(李公麟)[1437~1509]은 박팽년(朴彭年)의 딸에게 장가들며 출사에 제한을 받았고,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아들을 잃자 중종반정 후 청주에 은둔하였다. 은진 송씨 송세량(宋世良)[1473~1539]은 중종 때 회덕에서 남일면 화당리 처가로 입향하였다. 고령 신씨 신광윤(申光潤)[1468~1554]은 신숙주(申叔舟)의 손자로 중종반정 이후 농장이 있던 북이면 용계리로 낙향하였다. 밀양 박씨는 박광영(朴光榮)[1463~1537]이 갑자사화로 귀양을 가자 부인 중화 양씨가 친정으로 자식들을 데리고 들어왔고, 박훈(朴薰)[1484~1540]은 기묘사화 후 외가가 있던 청주로 낙향하여 후손들이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한양 조씨 조승윤(趙承胤)[1496~1549]은 기묘사화 때 목천에 은거하다가 외알아버지 류안수(柳岸秀)를 따라 강내면 궁현리로 들어왔다. 남양 홍씨 홍해(洪瀣)는 선대가 기묘사화로 화를 입자 1535년경 미원면 수산리에 정착하였다. 곡산 연씨 연정설(延井渫)[1433~1511]은 사화를 겪고 부인 진주 류씨의 고향인 현도면 노산리에 정착하였다. 초계 변씨 변충남(卞忠男)[1495~1546]은 중종 때 부인 파평 윤씨의 고향인 내수읍 비홍리로 입향하였다. 사화의 직접적인 피해로 입향한 이들 중 남인계인 고령 신씨를 제외하면 대체로 서인계로 성장하였다.
청주 지역 사림의 결집을 보여 준 계기는 청주 신항서원(淸州 莘巷書院)[충청북도 기념물] 건립 과정에서 드러난다. 제향 인물의 후손들과 주도 세력들은 대체로 지역의 사림으로 성장한 이들이다. 1570년(선조 3) 조강(趙綱)·이득윤(李得胤)·변경수(卞景壽) 등이 청주의 여러 사림과 상의하여 청주 신항서원을 창건하였다. 처음에는 효자 경연(慶延)과 박훈(朴薰), 김정(金淨)[1486~1521]·송인수(宋麟壽)[1499~1547]를 배향하였는데, 경연을 제외하면 모두 사화를 피하여 청주로 들어온 가문의 후예들이다. 청주 신항서원 창건을 주도한 조강은 송인수의 문인이다. 청주 신항서원은 임진왜란 때 불탔는데 1632년(인조 10) 복원하면서 한충(韓忠)·송상현(宋象賢)·이득윤을 추향하면서 지역을 대표할 만한 인물들을 제향하게 되었다. 문의에서는 1614년(광해군 6) 보성 오씨 오명립(吳名立) 등이 주축이 되어 노봉서원(魯峯書院)을 창건하여 1615년부터 송인수와 정렴(鄭𥖝)을 제향하였다.
[청주 사림의 분화]
청주 신항서원을 중심으로 사림이 결집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1656년 이색(李穡)과 이이(李珥)를 추향하며 본격적인 향전(鄕戰)에 돌입한다. 이이를 앞세우는 위차 문제로부터 서원의 운영을 서인이 장악하였다. 특히 1685년(숙종 11) 송시열이 쓴 묘정비를 세우며 갈등은 일단락되었다. 서원의 운영을 서인 노론계가 완전히 장악하였다. 문의 노봉서원의 경우도 1695년 송시열을 추향하면서 온전히 노론계 서원으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신항서원의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이 일단락되는 듯했지만 17세기 말 청주 지역은 세력을 확장하려는 서인계와 동인계가 외연을 확장하면서 다시 충돌하였고, 일부에서는 문중 서원 건립을 통하여 대응하였다. 남인 거점을 겨냥한 검암서원(儉巖書院)을 1694년(숙종 20)에 세워 조헌(趙憲)·한일휴(韓日休)·송국헌(宋國憲)·연최적(延最績)·지여해(池汝海) 등을 제향하였고, 고령 신씨는 신식(申湜)의 청주 신항서원 추향이 좌절된 후 1694년 쌍천서원(雙泉書院)을 세워 단독 제향하였다.
이 밖에 환국 이후 분화된 소론계 서원으로 1695년 송천서원(松泉書院)을 세워 김사렴·이정간·조강·최유경(崔有慶)·박광우(朴光佑)[1495~1545]·이대건(李大建) 등을 제향하기 시작하였다. 문의 지역의 노론들은 1695년 송준길(宋浚吉)을 모신 검담서원(黔潭書院)을 세워 향권을 장악하였다. 이처럼 분화된 사림들은 중앙 정치의 변동에 대응하며 혼맥과 학맥으로 연결되어 서원의 제향과 추향, 문집 간행 등을 통하여 결속력을 강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