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1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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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淸州鎭營 |
영어공식명칭 | the Cheongju Jin-You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관부(전통 시대)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한신 |
[정의]
충청북도 청주 지역에 있던 조선 후기 속오군 편성법에 따른 삼남 방어 체계에서의 주요 군사 기지.
[개설]
청주진영(淸州鎭營) 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대응하기 위하여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도입하는 가운데 설치되었다. 청주진영의 지휘관으로는 영장(營將)을 진영에 파견하느냐 아니면 조선 전기처럼 거진(巨鎭)의 수령이 겸임하느냐를 둘러싸고 여러 논의가 제기되었다. 1654년(효종 5) 이후 대체로 삼남은 영장을 파견하고, 그 밖의 지역은 영장을 겸임하는 형태로 굳어졌다. 청주진영에도 효종 대 이후 고종 대까지 영장이 파견되었는데, 수령이 영장을 겸임한 지역보다 청주진영처럼 영장이 파견된 경우가 조선 후기 진영의 특성을 잘 드러낸다. 한편 청주목이 역모 등으로 서원현으로 강등될 때 영장의 명칭도 서원영장으로 바뀌었다. 숙종 대에는 삼남 방어보다 효과적인 추풍령 방어를 위하여 1683년(숙종 9)부터 1687년까지 서원영장을 충청북도 옥천군으로 옮겼다가 환원하기도 하였다. 청주진영은 1895년 을미개혁(乙未改革) 때 전국의 지방군이 폐지되면서 함께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 전기 청주는 주진(主鎭)-거진(巨鎭)-제진(諸鎭)으로 구성된 충청도 군사의 진관(鎭管) 편성에서 충주(忠州), 공주(公州), 홍주(洪州) 등과 함께 충청도 4대 거진에 해당되었다. 충청도의 주진은 별도로 병사(兵使)가 파견된 해미와 관찰사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겸임한 충주에 있었고, 청주 등 4개의 거진은 목사(牧使)가 첨절제사(僉節制使)를 겸임하였으며, 제진은 군수(郡守)·판관(判官)·현감(縣監)이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절제도위(節制都尉)를 겸임하였다. 거진인 청주는 한편으로는 주진의 통제를 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제진인 천안·옥천·청주·직산·목천·문의·회인·청안·진천·보은·영동·황간·청산 등을 통제하였다. 아울러 청주목사가 거진에 소속된 전체 군병을 총 지휘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므로, 청주목의 군병은 다른 군현과는 달리 수령이 아니라 판관(判官)이 지휘를 맡았다.
이렇게 진관 체제는 평시에는 거진, 즉 진관이 중심이 되어 훈련과 병기의 점검 등을 담당하고, 유사시 각각의 진관이 소속 군병을 정비하여 주장(主將)의 명령을 받음으로써 한 진관이 패배하더라도 다른 진관의 군사가 적을 공격하거나 적의 진격을 차단하여 적의 전진을 저지하는 전술이었다. 하지만 진관 체제는 군사 지휘관을 겸임한 수령 중 병법이나 무재(武才)가 부족한 경우 유사시에 군사를 제대로 지휘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임진왜란의 경우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기 위한 대구와 충주 방어선 등에서 제승방략 전술이 활용되었다. 그러나 대구 방어선과 충주 방어선에서의 조선군 패배로 인하여 조선 측에서는 군사 체계의 재편을 시도하게 되었다.
조선에서 의도한 바는 부대 편성의 체질을 개선함으로써 일본군에 대응하고, 1592년 이래 재침이 발생할 경우 이에 적절하게 대처하는 것이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명(明)의 병서인 『기효신서』 내 병법을 도입하여 1593년(선조 26)과 1594년(선조 27)에 훈련도감과 지방의 속오군을 창설함으로써 전쟁 초반에 드러난 문제점을 개선하려 하였다. 이때 지방에는 한 도에 몇 개의 영(營)을 설치하고 수령 대신 영의 최고 책임자로서 군사 지휘를 전담하는 영장을 두었다. 이에 따라 청주에도 임진왜란 중이었던 1594년 충청북도 옥천에서 영장의 진(鎭)을 옮겨와 진영을 설치한 것이다.
[조직 및 담당 직무]
중영(中營)인 청주진영은 병영과는 달리 읍성 밖에 있었는데, 읍성 남쪽 입구에 있는 남석교(南石橋)의 오른쪽에 그리고 읍성 오른쪽 성벽 옆에 노란색으로 ‘남주내면(南州內面)’이라고 쓰인 아래에 있었다. 충청도의 경우 해미현감이 겸한 해미진영 및 별도로 영장이 파견된 4개 진영 중에서 홍주진영만 성 안에 있었고, 청주진영을 비롯하여 충주진영·공주진영은 성 밖에 있었다. 해미진영은 수령이 영장을 겸임하였으므로 읍성 안에 있었던 해미관아가 자연스럽게 진영의 건물로 사용되었다. 홍주의 경우에도 바다에 가깝게 있었으므로, 홍주진영은 왜구 등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비하여 진영을 성 안에 설치하엿던 것으로 볼 수 있다.
5개의 진영 중 중영인 청주진영의 군사 수는 4,485명으로 가장 군병이 많았다. 청주영장의 휘하에는 별장(別將) 2인, 천총(千摠) 3인, 파총(把摠) 6인, 초관(哨官) 33인, 지곡관(知穀官) 1인, 기고관(旗鼓官) 1인, 기패관(旗牌官) 58인, 마병(馬兵) 714명, 보군(步軍) 3,617명 등 다양한 군병이 소속되었다. 청주진영의 별장 2인은 마병 714명을, 천총 3인과 파총 6인은 각각 3부(部)와 6사(司)에 속한 보군 3,617명을 지휘하였다. 영장의 품계는 정3품이었고, 영장은 소속된 각 읍을 순력(巡歷)할 때 천총 이하 장관을 자단(自斷)할 수 있도록 1627년(인조 5)의 「영장절목(營將節目)」에 규정하였다. 이를 볼 때 훈련도감과는 달리 청주진영의 별장과 천총은 정3품 미만의 품계로 정한 듯하다.
[관련 기록]
청주진영 에 관한 기록은 『속대전(續大典)』 권4 병전(兵典) 영장절목,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기효신서』, 『인조실록(仁祖實錄)』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조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 등을 살펴볼 수 있다.
“김류가 아뢰기를 ‘지금 본도의 장계를 보니, 호서(湖西)의 길을 미리 방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주목사 심기성(沈器成)으로 하여금 정예병을 가려 뽑아 충주(忠州)로 달려가 형세를 보아 가면서 책응(策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위의 내용에서는 우의정 김류가 충청도 내의 모반 움직임을 차단하기 위하여 청주의 군사를 다른 지역으로 출병시켜 대응하게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당시 청주진영의 위상과 활용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아래의 기사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김류가 아뢰기를 ‘과거 이몽학(李夢鶴)이 갑자기 난을 일으켜 임천군수(林川郡守) 박진국(朴振國)이 불의에 포박을 당하였습니다. 그 당시 관찰사는 이정암(李廷馣)이었는데, 병사 이시언(李時言)과 수사 최호(崔浩) 및 편장(褊將) 박명현(朴命賢) 모두 장사였습니다. 그때 박명현이 갑옷을 입고 적진으로 돌격하여 그들의 형세를 꺾었기 때문에 바로 평정할 수 있었습니다. 신이 생각건대 오늘날 적도의 세력이 이몽학과는 다른데 또 제압할 만한 장수가 없으니 큰 걱정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장재(將才)를 미리 선발하는 동시에 군사를 가려 각각 100~200인씩 거느리고 도성에 머물러 대기하게 하였다가 차츰 형세를 보아가며 차례로 내보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옳다고 하였다. 시방이 아뢰기를 ‘적이 만일 산골짜기로부터 생각지도 않고 있던 지역으로 들어온다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충주와 청주 사이에 장수 한 사람을 배치하여 변란에 대비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위의 기사에서는 1646년(인조 24) 인조 대 조정에서 남부 내륙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날 경우 대응하는 방안을 논의하였다. 김류는 유능한 장수를 선발하여 100~200여 명을 배정하여 도성에 대기시키고 있다가 필요할 때 적정한 병력을 해당 지역의 전선에 투입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와 관련하여 이시방은 충주와 청주 사이에 장수 한 사람을 배치하여 도성을 보호하면서 변란에 대비하여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한편 『인조실록』에서는 청주진영에서 발생하는 병폐가 지적되기도 하였다.
“대사헌 최혜길(崔惠吉)이 말미를 받아 청주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상소하여 충청도의 폐단을 진달하기를 ‘병사(兵使)가 속오병(束伍兵) 개정하는 일을 몹시 엄하게 독촉하므로 수령이 받들어 시행하는 데만 급급하여 백성들을 소란스럽게 만드니, 우선 고치지 말도록 하여 민심을 위로하여야 하겠습니다’ 하고, 또 악공(樂工)·악생(樂生)의 가포(價布)를 더 징수하는 폐단을 말하였다. 소를 비국에 내리자, 비국이 아뢰기를 ‘이런 흉년에 찾아내어 속오군에 편입시키는 것은 과연 주린 백성을 괴롭히고 어지럽게 하는 것이니 명년까지 정지시키고, 경기와 강원도도 호서와 다름이 없으니 똑같이 시행하소서. 악공·악생의 폐단은 해조로 하여금 장악원에 물어서 상에게 여쭈어 처치하게 하소서’ 하였다.”
위의 기사를 보면 1647년(인조 25) 흉년이 들었고, 흉년이 들었음에도 충청병사가 청주에서 장정을 무리하게 속오군에 편입하여 민심이 어지러워지고 있음을 보고하였다. 비변사에서는 굶주린 백성을 혹사시키지 않도록 속오군 편입 조치를 일단 다음 해까지 중지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청주에서의 군정(軍政)이 충청도에서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었고, 조정에서 청주 일대 지역의 민심 동향을 주의깊게 살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변천]
정묘호란(丁卯胡亂) 직후인 1627년(인조 5) 4월 영장을 겸한 진관의 수령 중 문관 혹은 음관(蔭官) 수령이 전쟁에서 군병을 인솔하여 적과 맞서 싸우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을까 염려되어, 각 도(道)에 진관 및 영을 설치하고 전국에 당상(堂上) 이상의 무관을 영장으로 파견하여 평소의 훈련을 전담하고 유사시 군병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때 충청도의 청주에도 홍주, 공주, 충주와 함께 영장이 파견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은 후 재정상의 어려움 등으로 수령이 다시 영장을 겸임하도록 하여, 청주목사가 청주진영, 즉 충청도 좌영(左營)의 영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이후 충청병영이 1651년(효종 2) 청주로 이전되고, 이듬해인 1652년 해미에 진영이 새롭게 생기면서 조선 후기 충청도 진영의 명칭, 지휘 체계, 소속 군병 등에 큰 변화가 초래되었다.
병영(兵營)이 청주로 옮겨지면서 청주에는 중영을 자처한 병영과 좌영 등 2개의 진영이 병존하게 되었고, 병사(兵使)가 청주목사를 겸임하면서 청주목사는 좌영은 물론이고 중영의 영장도 겸하게 되었다. 이에 청주목사가 겸임하였던 좌영의 영장은 청주판관이 담당하게 되었으나, 1652년(효종 3) 병영이 청주로 이전하였는데도 병영 군병이 멀리 내포(內浦)에 있으므로 병영에 급한 일이 생겨도 제때에 도착하기 어렵다는 사정으로 청주 좌영의 군병을 병영에 소속시킨 다음 병영의 우후(虞候)를 영장으로 삼아 소속 군병과 지휘 체계상의 변화가 발생하였다. 또 병영이 떠난 해미의 군사적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1652년 해미에 진영을 설치하였고, 이름만 남았던 청주의 좌영 명칭을 해미진영으로 옮겨 청주의 좌영은 폐지되었다.
진영 제도는 북벌론(北伐論)이 제기되어 군사력을 강화한 효종 대에 이르러 그 틀이 확정되었다. 1654년(효종 5) 특진관 원두표가 삼남에 16명의 영장을 파견하자고 주장하였다. 원두표의 건의에 기초하여 1654년 청주에 영장이 파견되었으며, 중영을 자처한 병영과 구별되는 별도의 중영을 만들고 청주영장으로 하여금 군사 지휘권을 행사하게 하였다. 그 결과 병영(兵營)이 충청도 5진영 중 중영을 겸하였던 형태에서 벗어나 홍주[前營], 해미[左營], 청주[中營], 공주[右營], 충주[後營]의 충청도 5진영 체제가 정립되었다.
[의의와 평가]
청주진영 은 삼남의 방어 체계에서 영장이 파견되는 거진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효종 대 이후 충청도 5진영 체제에서의 중영 역할을 한 삼남의 방어 거점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