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1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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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乙丑甲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조약과 회담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한신 |
체결|제정 시기/일시 | 1600년 - 을축갑계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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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신 시기/일시 | 1686년 - 을축갑계 계회도 제작 |
체결 장소 | 야양산 부도암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
성격 | 갑계 |
관련 인물/단체 | 왕린|이자원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에서 경조사 상호 부조와 친교 등을 목적으로 향촌의 구성원 중 을축년 동갑생들이 모여 만든 갑계.
[개설]
조선 시대에는 양반 사족과 평민·천민 중에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생들이 모여 친목 모임을 가졌다. 이러한 친목 모임을 ‘갑회(甲會)’ 혹은 ‘갑계(甲契)’라고 하였다. 동갑생들의 갑회는 가장 수평적인 관계에서 친교를 나누며 상부상조의 우의를 다지는 만남의 자리였다. 갑회에서는 특별한 만남이나 기념할 만한 일이 있을 때는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였고, 그러한 일환으로 갑회도(甲會圖)를 제작하여 나누어 갖는 것이 관례였다. 갑회도는 모임의 장면을 그린 그림과 참석자들의 인적 사항을 기록한 좌목(座目), 그리고 서(序)·발문(跋文)이나 시문(詩文) 등을 함께 기재하여 족자 등으로 꾸미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체결 경위]
을축갑계의 결성은 을축년생인 왕린(王潾)[1625~?]과 이자원(李子元)이 1660년(현종 1) 인근의 동갑생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갑회의 결성 계획을 설명하고 참여 의사를 물었다. 그리하여 1661년(현종 2) 청주 인근 야양산(爺孃山) 부도암(浮屠菴)에서 첫 모임을 갖기에 이르렀다. 을축갑회의 결성 당시 11인이 참여하였다. 생원(生員)·진사(進士)를 거치지 않은 유학(幼學)의 신분으로서 대개 향리(鄕里)에 머물며 살았던 향반(鄕班)들이었다. 그러나 이중 일부는 관직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지방에서의 향촌계는 양반과 사족 집단으로 구성된 상계(上契)와 평민·천민들의 하계(下契)로 구분되는데, 계회를 가질 때는 대개 상하 합계(合契)로 이루어졌다. 을축갑회에서도 하계에 속한 상민(常民) 신분의 동갑생들이 함께 참여한 사실이 주목된다. 신분상의 차이는 있지만, 동갑이라는 사실을 존중한 조처로서 관행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을축갑회에는 18명이나 되는 자제들도 함께 참여하였으며, 자제들의 인적 사항을 좌목에 함께 기록하기도 하였다. 을축갑회에 배종한 자제들은 별도로 ‘소계(少契)’를 결성하여 선친의 뜻을 계승하였다.
[조약/회담 내용]
갑계에서는 구성원들이 지켜야 할 열두 항목의 입의(立議)를 정하여 놓았다. 입의는 동갑의 계원들에게 경조사(慶弔事)가 있을 때 상부상조하자는 취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갑계의 관리는 계원(契員) 중에서 두 사람이 유사(有司)를 맡아 1년씩 실무를 담당하기로 하였으며, 모임의 시점은 봄, 가을로 정하였다. 제재 사항으로는 불참자에게 부과하는 벌칙과 의결(議決)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 퇴출한다는 내용을 규정으로 정하여 두었다. 계원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탈퇴가 가능하였으며, 운영 중 추가 가입도 가능하였다. 갑계의 문서는 변숙(卞橚)[1625~1695]이 작성한 갑계 기록과 청주 유림의 우두머리였던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지은 발문, 이후직(李後稷)[1624~1698]이 쓴 화상설, 그리고 축시 등이 있다.
[결과]
을축갑계의 구성원들이 62세가 되던 해인 1686년(숙종 12) 이후직, 변숙 등 7인이 청주 보살사(菩薩寺)에서 갑계 모임을 가졌다. 당시 보살사의 화승 의인(義仁)이 회원들에게 갑회에 참석한 자들의 모습을 그려 후세에 전하자는 제안하여 갑회도를 제작하였다. 갑계에서는 모두 9점의 갑회도를 제작하여 상계의 계원 7인과 하계의 계원 2인에게 각각 한 점씩 나누어 가지도록 하였다. 갑회(甲會)는 관료들의 계회와 달리 동갑의 조건만 되면 결성이 가능하였기에 지방의 향반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한 계회의 유형이었다. 지방을 중심으로 한 갑회에서도 계회도(契會圖)의 제작 관행이 적용되었으며 그러한 영향으로 인하여 지방의 향반들 사이에서도 계회도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을축갑회도」였다.
[의의와 평가]
을축갑계는 조선 후기 향촌에서의 양반 사족과 평민, 천민이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공통적인 사실을 매개로 운영한 계 조직 중 하나이며, 향촌의 구성과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유용한 단서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