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0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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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藝術人 |
영어공식명칭 | Artist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현숙,홍순영 |
[정의]
충청북도 청주 지역에서 미술, 음악, 연극, 무용, 사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예술가.
[개설]
문화와 예술을 창조하는 힘은 오직 예술인에 의하여서만 가능하다. 우리의 풍토와 환경이 한국 역사를 만든 원동력이었다면, 청주의 풍토와 환경은 청주 지역에 사는 예술인들의 힘을 길러 준 토대가 되었다. 예부터 청주 지역의 예술인들은 전통적으로 양반의 고장이라는 충청도 특유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체면을 중시하고 예의를 존중하며, 가문과 씨족의 명예를 자랑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구전되는 설화와 열녀, 효부, 효자의 미담과 명현들의 시화가 많은 편이고, 고려 시대의 문장가, 조선 시대의 많은 시조 작가들이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를 토대로 현재까지 청주에서는 수많은 예술인들이 배출되고 있다.
[미술]
청주 출신의 미술인으로는 김복진(金復鎭)[1901~1940], 안승각(安承珏)[1908-1995], 정창섭(丁昌燮)[1927~2011] 등 여러 인물들이 있다. 한국 근대 조각의 선구자로 불리는 김복진은 근대기 최초의 조소(彫塑) 작가, 불상 조각의 대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특히 김복진의 작품 「백화」[1938]와 「소년」[1940]은 근대 조각의 사실주의 방향을 제시한 걸작으로 평가된다. 안승각은 충청북도 미술 교육의 토대를 마련하고 기여하며 충청북도 화단을 30여 년간 이끌어 온 인물이다. 정창섭을 비롯한 수많은 제자를 길러 내 청주 미술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정창섭은 제2회 국전에서 특선 입상, 제4회 국전에서 특선 등을 수상하였으며, 현재 한국적 모노크롬이즘[단색주의]의 대표 작가로 기록되고 있는 인물이다.
이외에도 서양화가 윤형근(尹亨根)[1928~2007]은 독특한 화풍으로 우리나라 추상[모더니증] 미술의 격을 높인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이재호(李在晧)[1953~ ]는 한국화 중에서도 실경산수(實景山水)에서 최고 경지를 보여 준 인물이며, 한국의 산하와 정취를 수묵화 기법과 서양화의 수채화 기법을 혼합한 방법으로 다루어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만들어 냈다. 내수읍에서 활동한 김기창(金基昶)[1913~2001]은 독특한 ‘청록산수’, ‘바보산수’, ‘문자도’, ‘걸레추상화’ 등을 완성하여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 큰 업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청주의 미술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선 학교에서 미술을 담당하였던 미술 교육자에 의하여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임상묵은 청주교육대학교, 충북대학교 교수를 지내며 작품 활동과 함께 후학 양성에 힘썼고, 개인적으로 기법을 공부하여 연마한 공예 작품을 주로 제작하였다. 김종현은 안승각과 더불어 청주 미술 교육의 양 기둥이라고 불리는 인물이며, 박영대 등의 제자를 길러 내며 미술 명문의 청주상업고등학교[현 청주대성고등학교]를 설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김은풍은 청주의 미술 교육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데, 후학 양성과 꾸준한 작품 활동을 지속하였다. 최재섭 역시 미술 교사로서, 충북구상작가회 조직, 각종 전시회 추진, 미술 대전 견학 등을 주도하여 지역 미술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왕철수는 교사로 근무하며 제자 양성에 힘썼고, 안승각, 정진국, 임상묵, 이호우 등과 함께 청주미술협회를 창립하는 등 지역의 미술 발전에 기여하였다.
[국악]
박팔괘(朴八卦)[1882~1940]는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인물이며, 당대 최고의 가야금 연주자이다. 가야금 산조 부분에서 뛰어나게 두각을 나타냈으며, 특히 가야금 병창을 창시한 역사적인 국안인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윤혁남은 청주에서 국악 협회를 구성하였고, 한국국악협회 충청북도지부와 충북국악협회도 창설하였다. 또 청주의 국악을 활성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청주 지역의 민속, 농요, 민속놀이, 토속 신앙물 등을 다양하게 보존하는 데도 앞장섰다.
[음악]
고희준[1929~1995]은 연세대학교 음악대학과 미국 포틀랜드 대학원 작곡과를 졸업하였으며, 청주대학교 교수를 지내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주요 작품에 「내 마음을 아실 이」 등이 있다. 테너 김일회[1959~2002]는 청주사범대학[현 서원대학교] 재학 중 콘트라베이스에서 성악으로 전향하여 이탈리아 유학을 다녀왔으며 귀국 후 성악가로 활동하였고, 서원대학교에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피아니스트이자 교수인 김하경[1926~1993]은 청주대학교 음악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고, 테너 박진[1938~1993]은 청주교육대학 교수를 지내며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충북음악협회장, 청주시립합창단 상임 지휘자를 역임하면서 청주 음악 발전에 기여하였다. 이상덕[1925~2004]은 청주교육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청주관현악단장, 청주시립교향악단 초대 지휘자 등을 역임하였다. 첼리스트 신주연은 국립교향악단 첼로 수석을 역임하였으며 서원대학교 교수로서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서예]
서예가 이상복(李相馥)[1929~1995]은 1960년대 충북서예가협회장을 맡아 오면서 이후 청주 지역의 유일한 국전 작가로서 충청북도 지역의 서예 후진 양성에 힘썼다. 금속활자장이자 서예가인 오국진(吳國鎭)[1944~2008]은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 활자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을 복원한 것으로 유명하며, 서예가 안효열은 청주 지역의 서예 보급과 발전에 기여하였다.
[연극·무용]
송선호는 충청북도교육청의 예능 담당 장학사로서 예능 종합 발표회와 극장 공연을 주도하였고, 8년간 충북무용협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69년에는 무용예술제전을 청주 현대극장에서 열어 청주 지역 무용 예술의 저변 확대에 기여하였다.
청주의 연극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는 충북연극협회 2대, 3대 지부장을 지낸 김근수와, 충북연극협회 초대 지부장을 역임한 김성렬 등이 있다. 1957년 김성렬, 이정실, 송주헌 등이 모여 충북연극협회를 구성하여 청주에 연극 무대가 열리게 되었고, 1960년 이후 최석하, 최영철, 민병인, 박태련 등에 의하여 청주의 연극이 이어졌다. 1970년대에 들어서 김은수의 제의에 의하여 임해순, 장남수 등이 참여하여 극단 시민극장이 결성되었다.
[사진]
사진작가 최윤식(崔潤植)[1925~1986]은 자연 풍물과 사람을 주제로 사진을 찍어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형성한 인물이다. 1953년 한국사진가연합회 충북지부장과 서클 녹영회를 만들어 청주 지역 예술 사진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이상윤은 고교 시절부터 사진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충북미술대전과 전국 단위 사진 공모전에서 다수 수상하였고, 한국사진작가협회 충북도지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