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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 1호 항공기 ‘부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3158
한자 國産 一號 航空機 ‘復活’
영어공식명칭 Buhwal, Domestically Manufactured Aircraft No. 1
이칭/별칭 1007호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유물/유물(일반)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쌍수리 335-1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기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작 시기/일시 1953년 10월 10일연표보기 - 국산 1호 항공기 ‘부활’ 제작
출토|발굴 시기/일시 2004년 - 국산 1호 항공기 ‘부활’ 발견
보수|복원 시기/일시 2004년 6월 1일 - 국산 1호 항공기 ‘부활’ 복원
보수|복원 시기/일시 2004년 10월 22일 - 국산 1호 항공기 ‘부활’ 복원기념식 거행
이전 시기/일시 2004년 12월 8일 - 국산 1호 항공기 ‘부활’ 경상공업고등학교에서 공군박물관으로 이전
문화재 지정 일시 2008년 10월 1일연표보기 - 국산 1호 항공기 ‘부활’ 국가등록문화재 제411호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국산 1호 항공기 ‘부활’ 국가등록문화재로 변경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4년 5월 17일 - 국산 1호 항공기 ‘부활’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변경 지정
현 소장처 공군박물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쌍수리 335-1지도보기
성격 항공기
재질 금속제
크기(높이,길이,너비) 6.6m[기장]|12.7m[기폭]|3.05m[기고]|380㎏[중량]
소유자 공군참모총장
관리자 국방부
문화재 지정 번호 국가등록문화유산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쌍수리 공군박물관에 있는 국산 경비행기.

[개설]

1949년 10월 1일 약 20대의 L형 연락기를 기반으로 창군한 공군은 건국기모금운동 등 비행기의 확보를 위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공군은 6·25전쟁 중 미국으로부터 F-51D와 C-47 등을 지원받았고, 제트기 도입도 추진하였다. 그렇지만 공군 내에는 공군참모장 최용덕(崔用德)을 위시하여 비행기 자체 개발을 염원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이에 따라 휴전 직전인 1953년 6월 공군기술학교에서 대령 김성태(金成泰)의 지휘 아래 정비과장 이원복(李元馥) 소령을 중심으로 한 국산 비행기 개발이 추진되었다. 1953년 10월 10일 국산 1호 항공기 ‘부활’(國産 一號 航空機 ‘復活’)이 제작되었다. 국산 1호 항공기 ‘부활’은 2008년 10월 1일 국가등록문화재 제41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국가등록문화재로 변경되었다.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청의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국가등록문화유산자료로 바뀌었다.

[형태]

국산 1호 항공기 ‘부활’ 은 전면에 단발 프로펠러가 달린 고익기 방식의 단엽기로 전후 탑승 방식의 2인승이며, 동체에 바퀴가 달려 있다. 앞쪽 측면에 대통령 이승만이 하사하였다는 ‘부활’ 휘호, 중간 부분에 태극마크, 꼬리날개에 ‘K’와 ‘1007’이 그려져 있다. 기장은 6,6m, 기폭은 12,7m, 기고는 3,05m, 중량은 380㎏이다.

[특징]

국산 1호 항공기 ‘부활’ 개발에는 공군기술학교의 교관과 조교 등 27명이 투입되었으며, 서울대학교 조선항공학과 학생 등도 참여하였다. 개발 요구 조건은 첫째 국내에서 제작이 용이할 것, 둘째 관측 및 연락용으로 활용 가능할 것, 셋째 수상기로도 전환 가능할 것이었으며, 승원 2명에 하물(荷物) 30㎏을 수용하면서 300㎞의 항속 거리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성능은 공군의 첫 보유 기종인 L-4에 약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이원복에 따르면 부활호는 L-16 기종의 엔진과 프로펠러, 강착 장치, 계기 등을 사용하면서 동체 및 날개 등을 독자적인 구조로 설계 제작하는 방식으로 개발되었다. 1953년 10월 개발이 일단락된 부활호의 제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당시 공군의 기록에 따르면 최대 속도는 약 시속 193㎞[120mph], 항속 거리는 314㎞[800리], 상승 고도 5,800m, 실속 고도 4,970m였다. 부활호는 6·25전쟁 초반 전사한 중위 천봉식(千奉植)을 기리고자 성에서 딴 ‘1000’과 행운의 숫자 ‘7’을 합한 ‘1007호’의 제식 번호를 받았다. ‘부활호’라는 이름은 1954년 4월 3일 이승만에 의하여 명명되었다.

부활호는 한동안 공군기술교육단에서 보유하고 있었지만, 실제 비행에서 거의 활용되지 않았다. 1960년 10월 17일 공군본부는 경상북도 대구시의 일용학원 산하 한국항공초급대학으로 폐항공기들을 이관하였는데, 여기에는 L-16 기종으로 명시된 ‘1007호’, 즉 부활호가 포함되었다. 한국항공초급대학은 부활호 등을 분해하여 실습용으로 활용하였다. 1965년 문교부의 지침으로 한국항공초급대학이 폐교되자 일용학원은 해당 교사에 경상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였고, 1967년 부활호 잔해를 실습동 지하 창고에 그대로 두었다.

[현황]

국산 1호 항공기 ‘부활’ 의 개발 사실은 1980년대 후반 이후 항공 역사 관련 서술에서 전하여졌고, 기록을 토대로 1999년 실물 크기의 모형이 제작되었다. 2003년 『중앙일보』의 기사를 통하여 경상공업고등학교 지하에 부활호 잔해가 있다는 제보가 나오면서 2004년 존재가 실물로 확인되었다. 공군은 제81항공정비창의 주관 아래 부활호 복원 사업을 추진하였다. 복원 사업은 조종 계통 및 엔진, 이·착륙 장치 등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유사 기종을 참조하면서 비행 가능한 상태로 만드는 데 방점을 두었다. 2004년 6월 1일 복원이 완료된 부활호는 10월 22일 복원기념식을 거행하고 12월 8일 공군사관학교공군박물관으로 이관하였다.

[의의와 평가]

국산 1호 항공기 ‘부활’ 은 항공력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아래 자체적인 비행기 개발에 착수하여 성과를 낸 최초의 국산 비행기라는 의의를 지닌다. 다만 기체의 상당 부분을 L형 연락기에서 차용하여 국산화율이 현저히 떨어졌으며, 복원 상태도 비행 성능 확보에 우선하면서 원형과 상이한 부품이 다수 장착되어 있다는 한계도 지니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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