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1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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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Korean War |
이칭/별칭 | 한국전쟁,6·25,육이오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수룡 |
[정의]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군이 북위 38도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반도에서의 전쟁.
[역사적 배경]
미국과 소련이 그어 놓은 38선은 남북한이 각각 별개의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국경 아닌 국경선이 되었다. 북한은 소련의 도움을 받은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여 1949년 3월에는 북한과 소련 간 군사비밀협정을, 중국과는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중국 홍군 휘하에 있던 조선인 부대 2만 5000명이 북한에 인도되었다. 이로써 10개 북한군 사단 13만 명이 38선에 배치되었고, 10만 명의 예비군까지 후방에 조직되었다.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게 된 김일성은 국내외 정세의 변화에 고무되어 무력 통일을 구상하게 되었다. 1949년 말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남한에 대한 무력 침공 계획을 승인받았다. 한편 남한에서는 1948년 8월에 정부가 수립되면서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가 각각 육군·해군으로 국군으로 개편되었고, 1949년 4월에는 해병대, 그리고 10월에는 공군이 창설되어 병력은 약 10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장비가 빈약하여 북한의 군사력에는 비할 수 없는 상태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전면 남침을 개시하였다. 이에 미국은 25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 소집하여 북한의 무력 공격을 ‘침략 행위’로 규정하고, 7월 7일에는 유엔 안보리에서 미국의 맥아더를 유엔군 총사령관에 임명함으로써 유엔군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6월 27일에 이미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7월 3일에는 한강을 넘어 파죽지세로 남진을 계속하였다.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24보병사단이 한반도에 투입되어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전세를 만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경과]
청주와 청원은 6·25전쟁 발발 후 불과 15일 만에 전쟁터로 변하였다. 청주와 청원 일대에서 북한군을 맞은 국군은 서울을 내어주고 남하한 1군단 예하의 수도사단이었다. 김석원 사단장이 지휘하는 수도사단은 진천에서 후퇴하여 청주 북쪽 미호강에 저지선을 설정하였다. 청주에서 북한군 진격을 저지시킨 뒤 보은을 거쳐 소백산맥에서 방어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 당면 목표였다.
585번 도로를 따라 남진한 북한군은 7월 11일 오전 8시 청주 북방 10㎞의 오창에 도달하여 미호강 도하를 준비하였다. 수도사단은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하여 미호강의 유일한 교량인 팔결교를 폭파하고 항공 지원을 요청하여 오근장 북쪽의 북한군 집결지를 공격하였다.
야간 도하를 준비한 북한군은 7월 12일 오후 9시 보병과 전차 그리고 포병 협동으로 화산리 및 오근장 방면에서 도하를 개시하였다. 미호강 남쪽 야산 진지에 있던 제18연대와 제1연대는 1차로 북한군을 저지하였지만, 다음날 7월 13일 새벽 재개된 도하공격을 받고 약 5시간의 격전 후 사단의 주저항선이 무너졌다.
2차 저지선은 청주 남쪽 청원군 남일면[현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의 국사봉-고은리-성무봉[431고지]에 설정되었다. 이에 수도사단은 청주를 빠져나가 남일면으로 후퇴하여 7월 14일 오전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7월 13일 5시경 청주에 접근한 북한군 제2사단은 자정 무렵 청주시를 완전 점령하였다. 이때 청원군 일대에는 수도사단 뿐만 아니라 봉무산 일대에 제2사단이, 미원 일대에 제1사단이 방어선을 펴고 있었다.
청주에서 고은리 방면으로 온 북한군은 오후 2시경 선두가 4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남일초등학교를 점거하였다. 청주에서 부강으로 온 북한군 제2사단 부대는 오후 3시 수대리와 고치리 선까지 진출하였는데, 기존에 배치된 제8연대 제2대대가 가까스로 격퇴하였다. 7월 15일 6시부터 북한군 제2사단은 고은리와 부강리 방면으로 재차 남하하였다. 수도사단은 집중 포격으로 일단 저지하였지만, 전열을 재정비한 북한군의 공격으로 인하여 갈수록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이에 제1사단은 예비대인 제17연대를 동원한 반격 작전을 개시하여 7월 15일 오후 1시에 제17연대 제3대대는 효촌리와 장암리 방면으로 북한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다. 북한군은 용평 방향으로 철수하였다가 전차를 앞세워 공격으로 전환하였다. 사단 본부는 1개 대대만으로 용평리 일대를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오후 7시경 철수시켰다.
북한군 제2사단은 전열을 정비하고 수대리·고은리·성무봉 방면으로 동시에 공격하였다. 북한군의 성무봉 공격은 제18연대 제1대대의 저항에 부딪쳐 실패하였지만, 고은리 공격은 치열한 공방전으로 이어졌다. 북한군의 전차를 동원한 우회 공격을 당한 제18연대 병력은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무질서하게 철수하였다. 국사봉의 제8연대도 고전하고 있었다. 장암리와 가산리 방향으로 공격하는 북한군에게 점차 밀리기 시작하였다. 제1군단장 김홍일 소장은 7월 16일 아침 북한군이 전 전선에서 공세를 취하자 후퇴를 결정하였다. 유성 쪽으로 철수한 대전의 미 제24사단과 전선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문의의 제2사단을 염티재로 재배치하고, 수도사단을 보은으로 철수시켰다. 수도사단은 17일 오후 제8연대가 최종적으로 보은에 집결함으로써 군단의 전선 조정 계획에 따른 철수를 완료하였다.
[결과와 의의]
7월 11일부터 16일까지 미호강에서 고은리 일대의 전투로 북한군 제1군단 제2사단의 남하를 저지한 것은 큰 성과이다. 이에 북한군의 남진 속도를 늦추는 결과를 가져왔다. 북한군 제2사단은 청주를 점령하고 대전 공격에 가세할 계획이었지만 미호강과 청주 남쪽에서 국군에게 저지당하여 불가능하게 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한 전투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