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505 |
---|---|
한자 | 住生活 |
영어공식명칭 | Housing Life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경옥,박종선 |
[정의]
충청북도 청주 지역의 문화와 생활 양식이 반영된 주택 및 주거지에서 이루어지는 삶.
[개설]
주생활은 전통적으로 자연·인문 지리 환경에 따른 주거 양식과 생활 문화의 차이에 따라 지역별 특성이 다르게 나타난다. 현대에는 건축 기술이 발달하고 소득 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전통적인 주택은 대부분 사라지고 아파트, 다가구 주택, 단독 주택, 연립 주택, 다세대 주택 등 현대화된 주거 형태로 변화되었으며, 특히 단독 주택은 점차 줄어들고 공동 주거 형태가 늘어남에 따라 주거 양식의 큰 차이점을 찾아볼 수 없는 상태이다.
이제 충청북도 청주시의 특색 있는 주생활을 알아보기 위하여 주거 중심지의 변천과 함께, 현재까지 남아 있는 전통적인 주거 형태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변천]
고대 청주 지역의 범위는 무심천과 미호강이 만나는 미호평야 일대가 중심지였다가, 점차 현재의 시내 중심부로 이동하여 689년(신라 신문왕 9) 축조된 청주읍성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동심원 모양으로 확대되어 갔다. 청주 지역은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근대적 도시의 모습을 갖추었고, 1931년 청주읍으로 승격하고 철도 교통의 요충지가 되면서 1939년 10월에 청주 시가지 계획을 발표하게 되었다. 읍성 내부였던 곳은 현재의 도시 중심부로 발전하였고 예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있던 청주읍성 남쪽의 상당구 남문로1가와 새롭게 정비된 상당구 문화동·남주동에는 1930년대부터 1940년대 사이에 세워진 시멘트 기와의 주거 전용 건물이 한옥 형식으로 지어지거나 점포가 딸린 주거 겸용 건물이 지어졌다. 당시의 건물들은 현재도 남아 있다.
1950년대 이후의 주택은 재료, 시설, 설비 면에서 현대화되었으며 1970년대 이후에는 도시 중심부에서 확산되어 북부, 서부, 남부 지구로 도시 개발이 이루어졌다. 시 주변부의 농촌 지역이 1983~1990년에 편입되어 청주시의 주생활 부분은 도시 중심부, 새로이 개발된 아파트 지구의 도시적 특성을 나타내는 곳, 농촌적 특성을 나타내는 곳으로 나누어진다.
1990년대 이후부터 2024년 현재까지 아파트, 연립 주택, 다세대 주택, 다가구 주택 형식으로 주택이 지어지고 있으며 전통적인 좌식 생활, 안방 중심 생활에서 서구식 의자식 생활, 거실 중심 생활을 유도하는 평면 계획으로 건설되어 주생활도 서서히 변화하여 갔다. 2014년 청주시와 청원군의 통합으로 청주시 외곽 지역은 각 읍면의 중심 지역을 제외하고는 농촌 마을의 주생활 특성을 보이고 있다.
[청주 지역의 전통 가옥]
청주 지역은 열 곳의 고가(古家)가 향토 유적을 포함한 유형유산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전통 고가를 중심으로 살펴볼 때 안채는 부엌과 안방이 남쪽을 향하고 대청과 건넌방이 기역자형으로 붙은 형태[곱패집]와 부엌·안방·대청·건넌방이 일자형으로 배치된 것이 일반적이다. 사랑채는 사랑방·대청·작은사랑방으로 구성된 일자형으로 안채 앞에 배치되었다. 4칸 일자형 안채에는 부엌 옆에 방이 3개가 줄지어 있는 형도 있다. 부엌·안방·윗방·사랑방으로 되어 있으며, 윗방은 안방에서 드나들 수 있게 되어 있다. 안채 뒤에는 뒤란[뒤뜰]이 있고 여기에 장꽝[장독대]이 있는데 부엌 뒷문을 통하여 드나들게 되어 있다.
상당구 낭성면에 조선 후기 신후(申逅)[1708~1779]가 지은 청주 과필헌(淸州 果必軒)[충청북도 민속문화유산]은 낮은 야산 앞에 자리 잡고 있는 남향집이다. 고가로 들어가는 입구에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 뒤로 행랑채와 안채가 구역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안채와 행랑채 사이 동쪽에 생활을 위하여 새로 건물을 축조하여 전체적으로 미음자집 배치를 하고 있다.
상당구 남일면 고은리에 있는 1861년(철종 12)에 지은 지주 계층의 가옥인 청주 고은리 고택(淸州 高隱里 古宅)[국가민속문화유산]은 산의 흐름과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지형에 따라서 가옥을 배치하고 있다. 전체적인 배치는 기역자형의 안채를 비롯하여 사랑채, 행랑채, 광채, 곳간채 등이 있다. 동쪽에 사랑채와 서쪽에 기단을 조성하여 안채를 배치하고 있다. 안채의 서쪽에는 광채와 동쪽에는 곳간채가 있고, 안마당 앞으로는 일자형 행랑채가 있다. 행랑채에는 동쪽 끝에 문간이 포함되어 있고 다시 동쪽으로 일자형 사랑채가 배치되어 있다. 안채를 제외한 현재의 건물들은 1930년대에 다시 지은 것으로 다소 격조가 떨어진다는 평을 듣고 있다. 사랑채 앞의 바깥마당은 담장 없이 개방적으로 넓게 조성되어 있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내외담[집 안에 쌓는 내담이나 샛담 개념의 담장이며 특히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쌓는 가림벽 역할을 함]을 행랑채에서 사랑채 후면까지 지형을 이용하여 기역자로 축조하고 있고, 안채 쪽으로 중문을 설치하고 있다.
흥덕구 신전동에 있는 청주 신전동 고가(淸州 薪田洞 古家)[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는 1926년에 한옥 형식으로 건립되었다. 안채는 일자형으로 부엌과 2칸의 안방, 대청, 건넌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길게 다듬은 돌로 만든 3단 받침대 위에 둥근 주춧돌과 네모 기둥을 세웠으며, 앞뒤에 퇴[본채의 앞뒤나 좌우에 딸린 반 칸 너비의 칸살]가 있다. 안채, 사랑채, 행랑채는 디귿자집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건물이 세워진 연대가 오래지 않았기에 근대의 영향을 받은 모습도 있지만, 안채·사랑채·행랑채가 고루 갖추어져 전통 주거 건축의 모습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밖에도 상당구 문의면 문산리에 있는 문의문화재단지 내에는 대청댐 수몰 지구 내에 있던 전통가옥을 비롯하여 옛 청원군 지역에 남아 있던 청주 노현리 고가(淸原 蘆顯里 古家)[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 청주 부강리 고가(淸原 芙江里 古家)[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 청주 관정리 고가(淸原 官井里 古家)[충청북도 문화유산자료] 등을 옮겨 놓았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전통적인 주택에서 영위하는 주생활은 1세대가 집 안에 기거할 때는 안방에 부부, 건넌방에 자녀들이 기거하며, 2세대일 경우는 안방에 부모가 되는 부부와 함께 대개 15세 이하의 나이 어린 자식들이 자며, 건넌방에는 맏아들 부부와 맏아들 부부 자식들이 기거한다. 아주 많은 수의 대가족이 아닌 경우는 보통 이렇게 두 방만 사용한다.
마루가 있는 곱패집인 경우 여름 한때 대청을 이용하기도 한다. 잠자는 순서는 아버지가 앞문 쪽에서 자고 사이에 아이들을 두며 다음에 어머니가 잔다. 머리는 모두 윗목 쪽으로 향하게 한다. 손님이 왔을 때 남자 손님인 경우 사랑방에 모시고 여자 손님인 경우 안방에 모신다. 식사는 안방에서 하는데, 여름에는 마루에서 한다.
관혼상제의 경우, 성인식인 관례는 안방 아랫목에 제사상을 차리고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식으로 행하는데, 상투는 100일 전에 틀었다. 혼례는 마당 가운데 멍석을 깔고 그 위에서 자리를 펴서 높은 상을 차리고 신랑은 동쪽, 신부는 서쪽에 서는 서동부서(婿東婦西)로 의식을 거행하였다. 상례는 안방 아랫목에 시신을 눕혀 놓고 윗목에 제사상을 차려 놓아 지내며 방은 그냥 공방으로 비워 둔다. 제례는 안방 아랫목에 제사상을 차려 놓고 밤에 지낸다. 대청이 있는 곱패집에서는 대청 중앙에 제사상을 차려 놓고 지낸다. 큰일을 치를 때 접객은 윗방이나 사랑방을 이용하며 흔히 마당에 천막을 쳐서 쓰기도 한다.
가택의 수호신으로는 성주신과 터주신을 모시는 의식을 한다. 정초에 대문에 엄나무걸기를 하고, 방에 복조리걸기도 한다. 대개 대보름 전후에 4~5명의 풍물패들이 각 집을 돌면서 지신밟기를 하며 마루에 고사반을 차린다. 몇몇 가구에서는 정월고사를 지낸다. 팥고물 시루떡에 쌀을 담은 주발을 올리고 주발에 촛불을 밝혀 성주[상량보] 아래에 놓는다. 고사를 지낸 다음에 장광[장독대], 대문, 뒷간 등에도 떡을 떼어 갖다 놓는다. 10월에는 가을고사를 지낸다. 동지에는 팥죽을 쑤어서 터주단지와 성주에 한 그릇씩 떠 놓고 가택신을 모신다. 달마다 초사흗날에는 집의 뒤뜰에 있는 터주 위에 찬 물을 올리고 치성을 드린다. 햇곡식을 처음 수확한 시기에는 터주단지 안의 묵은 곡식을 햇곡식으로 갈아 준다.
[근현대 주거생활의 변화]
전통적인 주택은 근대화의 영향으로 변화하는데, 1930년대에는 도시형 개량 한옥과 한일 절충식 가옥이 청주시 전 지역에 등장하고 1930년대 말부터는 소규모 영단주택[조선주택영단(朝鮮住宅營團)에서 만들어 보급한 일본식 개량 주택]이 지어졌다.
미군정 때는 개량 한옥이 지어지며 서민과 중류 계층이 살게 된다. 평면은 전통적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것으로 기역자형의 안채에, 일자형의 사랑채가 대문간으로 배치되어 디귿자집 모양을 이루었다. 안방은 두 칸으로 윗방이 있으며 규모가 큰 경우는 건넌방도 두 칸으로 만들어졌다. 사랑채는 셋집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외형적으로는 전통 주택보다 처마 길이가 짧아지고 지붕이 좁은 홈통을 달았다.
1950년 6·25전쟁 중 청주 지역도 700여 채의 주택이 파괴되었다. 1951년 하반기에 충청북도 지역 5개년 주택 건설 계획으로 국민 후생 주택 도시 A형 100호, 농촌 B형 1,000호, 피난 이재민 월동 간이 주택 800호를 건축하게 된다. 이후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ited Nations Korea Rehabiliation Agency, UNCRA]의 원조로 1954년 청주시는 청원구 내덕동, 흥덕구 운천동, 서원구 사직동에 100호의 도시형 국민 후생 주택이 건설되어, 20평 이하의 부흥 주택이 1960년대 중반까지 지어졌다. 부흥 주택의 평면은 전통 주택과 달리 겹집으로 마루방이 전면에 배치되고 좌우에 방을 두었다. 뒷면 마루방 뒤로 안방이 있고 안방 측면으로 부엌을 두었다. 마루방은 난방이 되지 않아 거실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각방의 통로 역할을 하였다. 부엌과 안방 사이에는 사잇문[샛문]이 있어 안방에서 가족이 모여 식사하는 안방 중심 생활을 하였다. 욕실과 화장실, 빨래 공간은 마당의 한쪽이나 대문 가까이 자리 잡았다. 주택의 지붕은 박공지붕, 모임지붕이 유행하였고 기와는 붉은색 평기와를 사용하였다. 외벽 및 담장 처리는 시멘트 모르타르 위에 페인팅하는 식 일변도로 건설되었다.
청주에서 민영 주택은 1967년부터 본격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하였고 대부분 한옥의 외관을 답습한 기역자형의 기와집이었다. 또 평면은 공영 주택의 영향을 받아 겹집으로 지어졌고, 지붕은 기와로 우진각지붕이며 벽체는 시멘트 벽돌로 지었다.
1970년 이후 주택은행지점이 청주에 설치됨으로써 민영 주택의 경기는 활발하여지고, 주택의 외관은 한옥에서 양옥으로 형태가 바뀌게 된다. 재래식 부엌이 입식화되어 안방에서 식사하는 것이 부엌으로 옮겨지며 욕실도 주택 내부로 들어오게 된다. 현관이 설치되어 마루방이 거실로 독립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안방에서 가족이 모이고 손님 접대가 이루어지는 전통적인 주생활 관습은 유지된다.
1970년대 중반에는 현관실이 생기고 거실의 기능이 확립되어 거실 중심형 생활이 이루어진다. 주택은 2층으로 지어지며 점차 외부 계단실에 의하여 1층, 2층으로 분화되어 2세대가 살 수 있는 형태가 된다. 특히 청주는 1960년대 말 이후 수도권 인구 분산 차원에서 지역 공업 육성이라는 국가적 시책과 맞물리면서 공업 단지가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도시에 인구가 급증하여 주택 수가 부족하게 되었고 택지 부족으로 주택 공급은 아파트 중심으로 변하게 된다. 1975년 처음으로 13평형 200세대 임대 아파트가 서원구 사직동에 건설되었다. 1978년부터 1981년 사이에는 20평형 이상이 상당구의 영동·북문로2가·북문로3가 일대에 지어지고 민영 아파트가 활성화되었다. 1982년부터 1985년 사이에는 흥덕구의 봉명동·송정동, 청원구의 내덕동·율량동·사천동에 30평 이상의 고급 아파트가 지어졌으며, 1990년 이후에는 흥덕구 가경동, 서원구 개신동, 상당구 금천동·용암동 등의 시 외곽 지대로 아파트 건설이 확산되어 갔다.
1980년대 후반부터 새로이 개발되는 택지지구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며 옛 단독 주택 지역에서는 단독 주택을 허물고 다세대 주택, 다가구 주택으로 신축하게 되었다. 2000년대에는 25층의 고층 아파트, 빌라라 불리는 연립 주택, 중형의 임대 아파트 등 다양한 주택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 아파트의 집 안 구조가 다른 주택 형식의 구조를 이끌고 있다.
[현황]
청주시는 1965년에 주택은 1만 4171동이었으며, 1971년 말에는 2만 7579세대에 주택수 1만 8152동으로 주택 공급율은 65.8%였다. 그러던 것이 2004년 11월 말에는 인구 유입이 많은 청주답게 인구 62만 5654명에, 19만 9394가구, 주택 16만 4637호로, 주택 공급율은 82.57%에 이르렀다. 당시 주택 유형의 구성을 보면, 단독 주택 26.50%, 아파트 68.97%, 연립 주택 3.84%, 다세대 주택 0.68%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아파트 위주로 주택 건설이 이루어져, 주택 유형에서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율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2021년 기준 단독 주택·다가구 주택[36.5%]과 아파트[59.4%] 비중이 전국보다 높고 연립 주택·다세대 주택의 비중은 낮은 편이다. 청주시의 단독 주택·다가구 주택 비율은 36.5%로, 수도권[25.1%]과 전국[33.6%]보다 높지만, 충청북도[43.9%]에 비하여 낮다. 아파트 비율은 59.4%로, 전국[52.9%]과 수도권[54.7%], 충청북도[50.0%]에 비하여 높은 편이다. 이와 달리, 연립 주택·다세대 주택 비중은 4.1%로, 수도권[19.4%]과 전국[12.5%], 충청북도[4.8%]에 비하여 낮은 편이다.
2023년 6월 기준 아파트에 거주하는 세대수는 23만 6307명이다. 아파트 거주 비율은 계속 높아지고 있으며,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아파트 거주를 중심으로 하는 생활 문화를 형성하여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