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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출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3860
한자 言論·出版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유영선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판매·배포의 목적으로 간행된 출판물.

[개설]

충청북도 청주의 출판의 뿌리는 깊다. 1377년 고려 시대 청주목 흥덕사(興德寺)에서 고승이었던 백운(白雲) 경한(景閑)[1299~1374]이 쓴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을 금속 활자로 펴낸 것이 기록상 최초의 출판이다. 흥덕사 발간의 또 다른 책은 『자비도량참법집해(慈悲道場懺法集解)』 2권이다. 조선 시대에 청주목을 중심으로 간행된 서적은 관판본이 44종, 사찰판본이 5종, 서원판본이 3종, 사사판본이 1종이다. 고려 시대 서적을 포함하여서 모두 55종의 서적이 청주에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 출판물은 충북연구원과 충북학연구소, 청주문화원 등에서 지속적으로 발간하고 있고, 충북대학교, 청주대학교 등 대학의 출판국에서도 연구서들을 활발하게 펴내고 있다.

[청주의 인쇄소]

도서 인쇄를 담당하는 청주 지역 인쇄 업소들은 전자 매체가 발달하면서 점차 사양길에 들어 한때 200여 개가 되던 인쇄 업소가 현재는 90개소로 줄어들었다. 청주의 인쇄협동조합은 1962년 6월 4일 상당인쇄소[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북문로3가 99-6]에서 모임을 갖고 조합을 결성하였다. 초대 이사장은 상당인쇄소 대표인 오인영이었다. 인쇄협동조합은 2000년 3월 충청북도 인쇄산업협동조합으로 변경되었으며, 2009년 4월 소식지인 『인쇄in충북』 창간호를 발간하였으며, 2009년 4월 인쇄인축제한마당을 열기도 하였다. 2011년 5월 인쇄산업협동조합 사무실을 현재 장소인 청주시 상당구 수동 427-9로 이전하였다. 2023년 현재 청주 지역의 90개 인쇄소가 조합에 가입하여 있다. 청주 지역 인쇄 업소들은 대부분 충청북도청청주시청의 배후 공간이 되는 상당구 수동 지역에 몰려 있다.

[현대 출판물]

청주 지역의 현대 출판물은 충북연구원과 충북학연구소, 청주문화원 등에서 지속적으로 도서를 발간하고 있고, 충북대학교, 청주대학교 등 대학의 출판국에서 연구서들을 활발하게 펴내고 있다. 또 2007년부터 17년째 청주시가 ‘1인1책 펴내기 운동’으로 지원금을 제공하면서 시민들이 자신만의 책 만들기 사업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였다. ‘1인1책 펴내기 운동’은 2023년부터 ‘구술 채록 자서전 만들기’와 ‘산문 쓰기’로 사업명이 변경되었다. 또 문학 단체인 청주문인협회, 내륙문학회, 뒷묵동인회, 충북수필가협회, 충북민족작가회의, 충북시조시인협회, 충북여성문인협회, 푸른솔문학회 등이 매년 동인지를 펴내고 있으며, 문예진흥기금 지원을 받은 문인들이 개인별 창작집을 발간하고 있다.

[청주 출신 인물의 문집]

청주 출신 인물의 문집 간행은 현재까지 73건으로 조사되었다. 문집의 발간 연도와 문집명은 다음과 같다.

이시발(李時發)[1569~1626]의 『벽오유고(碧梧遺稿)』, 신면구(申冕求)[1809~?]의 『국암유고(菊庵遺稿)』, 신광환의 『지포유고』, 윤승임(尹承任)[1603~1687]의 『주일재집(主一齋集)』, 강주(姜籒)[1567~1651]의 『죽창집(竹窓集)』[1654], 이광윤(李光胤)[1490~1535]의 『양서집(瀼西集)』[1752], 홍석기(洪錫箕)[1606~1680]의 『만주유집(晩洲遺集)』[1793], 오익환(吳翼煥)[1754~1797]의 『경산집(耕山集)』[1897], 박춘무(朴春茂)[1544~1611]의 『화천당집(花遷堂集)』, 홍주화(洪胄華)[1660~1718]의 『만은유고(晩隱遺稿)』[1802], 이수언(李秀彦)[1636~1697]의 『농계유고(聾溪遺稿)』[1806], 이득윤(李得胤)[1553~1630]의 『서계집(西溪集)』[1833], 오소의 『금암문집』[1853], 연최적(延最績)[1663~1693]의 『치당유고(癡堂遺稿)』[1871], 지덕해(池德海)[1583~1641]의 『뇌봉집(雷峯集)』[1875], 한충(韓忠)[1486~1521]의 『송재집(松齋集)』[1889], 이홍유(李弘有)[1588~1671]의 『둔헌집(遯軒集)』[1890], 정사호(鄭賜湖)[1553~?]의 『화곡집(禾谷集)』[1899], 조강(趙綱)[1527~1599]의 『모계집(慕溪集)』[1904], 송인수(宋麟壽)[1499~1547]의 『규암집(圭菴集)』[1907], 신좌모(申佐模)[1799~1877]의 『담인집(澹人集)』[1916], 이만헌의 『소산집』[1922], 신득홍(申得洪)[1608~1653]의 『지담집(芷潭集)』[1923], 채상학(蔡相學)[1837~1926]의 『회재유고(悔齋遺稿)』[1933], 송지수(宋志洙)[1793~1862]의 『내헌유고(耐軒遺稿)』[1935], 박익동(朴翼東)의 『소근재집(小近齋集)』[1937], 라헌용의 『혜전집(蕙田集)』[1937], 이홍제(李弘濟)[1722~1784]의 『백봉집(柏峯集)』[1941], 김제환(金濟煥)[1867~1916]의 『소당집(素堂集)』[1950], 신학석(申學錫)의 『퇴운집(退雲集)』[1951], 박주순(朴胄淳)의 『성암집(惺菴集)』[1952], 신면휴(申冕休)의 『회당유고(晦堂遺稿)』[1960], 신저의 『정관재집』[1961], 신식(申湜)의 『졸재집(拙齋集)』[1961], 신용의 『하은집』[1961], 박노중의 『창암집』[1962], 신철우의 『소미유고』[1962], 정두현의 『석재집』[1962], 신윤모의 『사우재집』[1964], 신현록의 『학사집』[1965], 박중영의 『눌재유고』[1966], 박훈『강수유고』[1966], 신웅태의 『용애문집』[1968], 신택의 『인재집』[1968], 송의섭의 『춘계집』[1969], 박상규의 『성당집』[1969], 신필청의 『죽헌집』[1972], 신병휴의 『구당집』[1973], 이건손의 『청운실기』[1974], 김성환의 『정당집』[1974], 신천석의 『죽간집』[1974], 박치화의 『손재집』[1975], 노궁의 『한원유고』[1976], 지광한의 『설악유고』[1977], 신창모의 『남게유고』[1978], 박정룡의 『덕곡유고』[1980], 박세미의 『휴암유고』[1980], 황종복의 『소심재유고』[1981], 신상렬의 『만헌유고』[1982], 윤영교의 『간송유고』[1983], 윤재혁의 『동곡유고』[1983], 김사우의 『용암유고』[1984], 이영길의 『도무집』[1984], 박윤섭의 『은암집』[1984], 신해철의 『우석고』[1988], 류활의 『태우집』[1989], 박건중의 『선곡유고』[1989], 신승구의 『석헌섬예』[1993], 노장우의 『금사문집』[1993], 이심도의 『자암집』[1995], 조두환의 『성당문집』[1995], 라상악의 『송은시집』[2002], 박종술의 『호운일고』[2006]가 해당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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