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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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獨立運動 |
영어공식명칭 | Independence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걸순,한애라 |
[정의]
1894년부터 1945년까지 충청북도 청주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국권 회복 운동.
[의병]
청주 지역 독립운동의 역사는 구한말 의병 항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전기 의병 때는 충주부[현 제천시]와 홍주부[현 홍성군]가 중심지였는데, 청주에서도 의병 항쟁이 있었다. 중기 의병이 봉기한 1905년 이후 청주에서 수백 명의 의병들이 일본군과 접전을 벌인 기록이 확인된다. 후기 의병은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인하여 촉발되었다. 군대 해산 이전까지 지방의 진위대는 전국에 8개가 설치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청주진위대였다. 진위대원들 중 상당수는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의병이 되어 청주를 중심으로 일본군과 맞섰다. 평민들 가운데 옛 청원군 세교리 출신의 한봉수(韓鳳洙)는 중부 지방을 대표하는 의병장이었다. 한봉수는 중기 의병 때부터 진천·보은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1907년 후기 의병 때에는 ‘번개대장’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신출귀몰한 유격전의 명수였다.
[3·1운동]
1919년 일제에 항거하여 거족적인 3·1운동이 발발하자 청주에서도 독립 만세 시위가 시도되었다. 먼저 1919년 3월 2일 천도교 신도인 인종익(印鍾益)이 300매 정도의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청주에 도착하였으나 곧 체포되면서 실패하였다. 그다음은 청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이 독립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는데, 3월 9일 경성 중앙학교에 다니던 신영호(申榮浩)가 청주공립농업학교 기숙사에서 학생들을 만나 경성의 상황을 전하고 만세 시위를 제안하여 「독립선언서」 300부와 태극기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3월 10일 학생들의 움직임을 수상하게 여긴 학교 측과 일제 경찰의 수색으로 시위 계획이 발각되면서 이 또한 실패하고 말았다.
청주 지역에서 처음 만세 시위가 일어난 것은 3월 21일 천도교인 민원식(閔元植) 등 수백 명이 참여한 내수시장 만세 시위였다. 그리고 이틀 후인 3월 23일 강내면 태성리의 산마루에서 봉화가 타오르자 인근의 18개 마을과 옥산면·남이면 등지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수십 개소의 산마루에서 횃불과 봉화가 타오르며 대한 독립 만세 함성이 터졌다. 3월 30일 1,000여 명이 참여한 미원장터 만세 시위에서는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후 4월까지 청주 지역 산마루와 장터 곳곳에서는 봉화와 횃불이 타올랐고, 만세 함성이 울려 퍼졌다.
[학생운동]
3·1운동 이후인 1920년 6월에 청년들은 청주청년회를 조직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1923년에는 조선 민립대학 설립 운동에 호응하여 청주에도 지방부가 조직되었다. 1927년 말에는 신간회 청주지부가 결성되었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파급되자 1930년 1월 21일 청주농업학교·청주고등보통학교·청주고등여학교 등 3개 학교 학생들이 연합하여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는 3·1운동 때 사회 계층으로 성장한 학생들이 독립운동의 전위 부대로 부상하였음을 의미한다. 이후 청주의 학생들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 정책에 항거하여 동맹 휴학을 벌이는 등 1940년대 전반까지 일제의 식민 정책에 맞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청주 출신 독립운동가]
청주 출신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외 곳곳에서 다양한 항일 활동을 전개하였다. 청주 출신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는 2023년 현재 총 113인이다. 시기와 활동으로 보면 구한말 국권 회복 운동인 의병에는 한봉수·정춘서·조용근·조성여·한경천 등이 참여하였다. 3·1운동 때에는 민족 대표 33인에 손병희·권병덕·신석구·신홍식이 이름을 올렸고, 김재갑·김재형·김호상·박준규·배민수·신경구·신영호·신학구·오교선·윤인보·이병선·이용실·장일환·정무섭·조동식·서정렬 등은 각각 고향을 중심으로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김제환과 조장하는 스스로 자결 순국의 길을 선택하였다. 남상렬·최명수·황영래는 독립군으로 활동하였고, 윤태훈·신인식·신순호 등은 한국광복군에 배속되었다. 신규식·신건식·이광·정환범 등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으며, 김수사는 민족혁명당, 민강은 비밀 결사 대동단, 이우민은 의열단과 다물단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곽재기는 의열단 단원으로서 밀양경찰서 투탄 의거를 준비하는 등 의열 투쟁을 펼친 대표적 인물이었고, 신형식·신흥구·한병호는 군자금을 모금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는 활동을 하였다.
정순만과 정양필 부자는 각각 러시아령과 미국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김태희와 신백우는 계몽운동을 주도하였고, 박선영·이상운·최영백 등은 학생운동에 참여하였다. 박무병·이종만·이중각·홍일창 등은 국내에서 다양한 항일 투쟁을 주도하였다. 한편, 1940년대 일본 유학 중 비밀 결사를 조직하였던 최세균·임병철과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일본군 군속으로 배치되어 있던 중 항일 비밀 결사 고려독립청년당을 결성하였던 임헌근의 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