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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2670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범철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에 있는 미호강을 따라 펼쳐진 미호평야의 역사.

[개설]

미호강미호평야는 오랫동안 인간 삶의 터전이 되어 왔으며, 여러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활동들은 다시 지형·생태 공간으로서 미호평야의 경관을 바꾸어 왔다. 이런 상호작용은 장구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여러 형태로 나타나면서 독특한 경관을 만들어 내게 된다. 따라서 미호강미호평야 경관의 변천은 주민 삶의 장구한 궤적을 반영한다.

[미호강 유역의 지형과 생태 공간]

미호강은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에서 지류인 칠장천이 합류하면서 시작하여,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에서 금강 본류와 만나 끝난다. 유로 연장은 89.2㎞로 우리나라에서 20번째, 유역 면적은 1,855.35㎢로 12번째에 해당하는 큰 하천이다. 백곡천, 한천, 초평천, 보강천, 내수천, 성암천, 무심천, 석남천, 병천천, 조천 등 여러 지류가 흘러들어 잘 발달한 수계는 진천·증평·미호 등 주요 평야를 적신다.

그중 가장 넓은 미호평야는 증평부터 조치원까지 너비 2~4㎞, 길이 약 25㎞로 펼쳐진 북동-남서의 충적지이다. 미호강을 중심으로 무심천무심천 지류인 천수천이 흘러 양호한 수리 조건을 갖추고 있다. 평야의 북서 및 동쪽은 침엽·활엽수림이 혼재한 차령산맥의 잔구성 구릉과 노령산맥이 둘러싸고 있어 전체적으로 분지의 모습을 띠고 있다. 구릉 및 산악들 사이에는 곡저 평야가 발달하여 있다.

안정적인 노년기 지형과 청정한 수원은 인간뿐만 아니라, 생태계 다른 종에게도 서식의 좋은 조건을 제공한다. 미호강 변과 곳곳에 발달한 모래톱은 천연기념물이면서 멸종위기 1급 종인 미호종개를 비롯한 어류와 철새에게 산란과 휴식의 공간이 된다. 주변의 구릉과 산악 또한 다양한 동식물의 생태 적소가 되어 미호강은 2009년 ‘한국의 아름다운 하천 100선’에 선정되었다.

[미호천에서 미호강으로]

미호강미호평야에 대하여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고대 문헌 자료는 거의 없다. 다만, 18~19세기 지도에 나타난 지명을 통하여 과거 미호강 지역에 대한 인식의 일단을 알 수 있다. ‘미호(美湖)’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지만,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동여도(東輿圖)」 등에는 미호강무심천의 합수 지점에 미호강의 다른 이름인 작천(鵲川)[까치내]이 있다. ‘미호’의 유래를 지도에 등장하는 ‘미곶(弥串)’에서 찾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일제 강점기 이래로 ‘미호천’이라고 불려 왔다는 점뿐이다. 접미사로 천(川)이 채택되었지만, 그 규모와 수용 인구를 고려하여 2019년 7월 국가하천으로 승격되었고, 2022년 7월에는 여론을 반영하여 미호강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미호평야의 중앙을 관통하는 미호강은 옛 청주시와 청원군의 경계를 이루었다. 실상과는 달리 인위적으로 나뉘었던 지형·생태 공간은 2014년 7월 1일 통합 청주시가 출범하면서 행정 구역상으로도 하나가 되었다.

[미호강과 함께했던 옛 사람들의 삶과 경관]

미호강 유역에서 인간이 거주한 역사는 구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거의 30곳에 달하는 관련 유적이 강변 평야, 주변 구릉, 다소 깊은 산지의 동굴 등에서 발견된다. 수렵 채집 생활을 영위하던 당시 사람들에게 미호강 유역의 모든 생태 환경이 생활 터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디에도 시설을 갖춘 주거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바, 한곳에 계속 거주하기보다는 계절에 따라 이동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미호강 본류에서 남쪽으로 약 3㎞ 떨어진 두루봉 등 동굴은 추위와 위험을 피하고 산지 동물 사냥의 거점이 되었을 듯하다. 사슴이 주된 사냥 대상으로, 특정 계절에만 이용하였음이 드러났다.

신석기 시대에는 석제 도구 등으로 보아 부분적으로나마 작물 재배가 행하여졌을 것으로 보이지만, 생계 자원의 주요 취득 방식은 수렵과 채집이었다. 현재까지 미호평야의 저지대나 얕은 구릉에서 소로리 등 약 10곳의 유적이 알려져 있다. 유적당 한두 기에 지나지 않지만 집터가 발견되어 정주 생활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적의 수가 많지 않고 크기도 작은 점으로 보건대, 구석기 및 신석기 시대 미호평야 일대의 인구 규모는 매우 작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면서 사뭇 다른 양상이 펼쳐진다. 미호강 유역, 특히 미호평야 및 인접한 구릉지대에서 마을의 수가 폭증한다. 청원구 오창읍 장대리, 흥덕구 봉명동·송절동·쌍청리·오송읍 등의 유적은 대표적인 청동기 시대 마을이다. 이 마을 유적들에서는 뗀돌도끼나 양날돌도끼, 홈자귀, 끌, 반월·삼각형의 칼, 낫 등 농경을 위한 석제 도구들이 빈번하게 확인된다. 이들을 통하여 획기적인 인구 증가는 물론, 정주 생활과 저지대 농경이 본격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농경사회에서 영역 표시물의 역할을 하였을 고인돌이 청주시에서만도 60기가 넘게 발견되는 점은 그런 당시 상황을 잘 보여 준다.

농경이 본격화하여 농업 경관이 형성되는 과정에서는 벌목과 개간이 필수적이다. 초목이 번성한 자연 경관에서 수렵 채집에 의존하던 때와는 매우 다르게 된다. 인구의 등락은 있었겠으나 농업에 의존한 산업·경제 구조가 획기적으로 변하지 않았던 전근대 시기 동안 미호평야에서는 그런 농업 경관이 가장 우세하였을 듯하다. 다만, 역사시대에는 지정학적 위치 등 관계적인 변수가 강조되면서 부차적 특성이 더하여지는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원삼국 시대에 미호평야 일대는 마한에 속하였다. 곳곳에 읍락이 생겨나면서 청동기 시대부터 시작된 마을 생활이 더욱 강화되었을 듯하지만, 현재까지 발견된 마을의 수는 많지 않고 10가구 미만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다수여서 그 상황을 실증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다만, 청주시의 송절동·문암동 일대에는 원삼국에서 삼국 시대로 넘어가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수백의 가구가 밀집하는 현상이 나타나 인구 성장을 언급할 만한 정보가 되기도 한다. 한편, 송절동, 오송읍 등 유적에서 보듯 큰 마을 유적 인근에 대규모 무덤군이 조성되어 봉분이 경관을 이루는 새로운 요소가 되기도 한다.

삼국 시대에도 마한의 경관적 특성은 계속되는 듯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북사(北史)』 등의 기사에서 유추할 수 있듯, 삼국 시대 백제의 영토였던 미호평야 대부분에서 논농사가 이루어진다. 마을은 습한 곳을 피하여 주변의 구릉에 자리하며, 인근에는 무덤군이 조성된다. 그런데 전반적으로는 유사하지만 중요한 변화가 나타난다. 삼국이 각축을 벌이던 상황에서 상당현(上黨縣), 낭비성(娘臂城), 낭자곡성(娘子谷城) 등으로 불리며, 군사적 요충지였던 미호평야의 주변 여기저기에 성곽이 구축된다. 그리하여 방어적 또는 군사적 요소들이 경관에 들어오게 된다.

삼국이 통일된 이후에는 고대 도시 경관으로의 변모가 본격화한다. 685년(신라 신문왕 5) 서원소경(西原小京) 설치가 그 시작이다. 통일 신라의 소경제(小京制)는 새로이 확보된 영토에 대한 효율적인 통치와 행정을 위하여 신라 왕경(王京)을 축소 모방한 거점 신도시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만, 고구려와 백제, 가야의 유민을 효과적으로 통치하되 기존의 중심지는 피하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이때야말로 미호평야 일대가 고대 도시 경관으로 변모하는 시발이라고 보아도 될 듯하다. 이러한 도시 경관은 중심부로서 도심 지역, 주변부로서 일반 농민의 거주지와 농토, 주변의 성곽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상당산성, 부모산성 등은 전란에 대비한 방어용 배후 성의 역할을 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세계 여러 고대 문명에서 보이는 초기 도시 또는 도시 국가와 유사한 모습을 띠게 되는 것이다.

도시 경관의 구축은 인구 집중과 궤를 같이하게 되며, 농업 외의 수공업도 추동할 수밖에 없다. 토기나 철기의 생산은 물론 생활 연료로서 수목에 대한 수요는 삼림 및 경관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특히, 미호강 유역에서 현재까지 40여 개소가 확인된 숯가마[炭窯] 유적에 주목하여야 할 듯하다. 그 최대 수요처는 원삼국 시대부터 들어선 제철 시설이었겠지만, 한두 기만의 숯가마 유적이 다수이면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점을 보면, 도시 생활의 편의를 위한 일상용의 생산도 제법 큰 비중을 차지하였을 듯하다. 정치적 긴장의 고조, 도시의 정착 등이 추동한 철, 토기, 숯 등을 생산하는 시설도 도시 경관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더불어 삼림 훼손도 경관 변화를 유발한 요소로 빼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고려 시대에 들어서 미호평야 일대에 전국 12목 중 청주목(淸州牧)이 설치되었고, 조선 시대에는 미호평야 일대가 충청좌도를 관할하는 지방 행정의 중심지였다. 지방 행정의 거점으로서 미호평야 일대의 역할은 고려·조선 시대에도 계속되며, 도시 경관이 더욱 강화된다.

[오늘날 미호강 유역의 생업과 경관]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의 사회경제적 수탈로 미호평야 일대 경관에 적지 않은 변화가 나타난다. 집중적인 수탈의 원인은 미호평야 지역의 기존 또는 잠재적 경제 역량과 관련이 있다. 당시 충청북도는 경기도에 버금갈 정도로 물산이 풍부하여 보리, 대두, 면화는 물론이고, 금 등 광물 자원이 풍부하였다. 물산 수탈의 핵심적 매개는 충북선 철도였다. 철도 자체가 새로운 경관 요소이기도 하지만, 종착지와 기착지로의 인구와 물류의 집중은 새로운 경제 유발 효과를 갖게 된다. 역설적인 경제 호황과 더불어 충청북도 내에서 청주의 위상을 부각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 남한강 수운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충주가 중심이 되었던 상황은 철도라는 육상 운송 수단이 정착하면서 변화를 일으켰다. 다만, 수탈 대상이 1차 산업 산물이고 산업 구조의 변화가 획기적이지 못하였던 바, 농업 경관의 우세는 계속된다.

광복 이후에도 상황이 크게 변하지 않는다. 잠업취체소, 종묘장, 임업시험장, 치수사무소, 산업장려관, 난(蘭)검정소 등 농업 생산 증대를 목적으로 하는 기관들이 도청 직속으로 설립되었으며, 농지 개혁이 해방 정국에서 최대 사건이었던 점은 그런 상황을 반영한다. 농업 생산 증대와 더불어 치산 대책도 중요 현안이었다. 땔감으로 나무를 사용한 까닭에 삼림이 갈수록 황폐하여졌다. 민관이 합동으로 치산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조림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1949년 식목일에는 6942만 1487㎡[7,000정보]에 1,500만 그루의 묘목을 심는 성과를 내기도 하였다.

현대로 오면서 농업 경관은 미약하여지고 급격히 산업 경관으로 변하게 된다. 2021년, 미호강 유역의 논은 263.7㎢, 밭은 182.6㎢로, 산업화가 본격화할 즈음인 1975년의 논 319㎢, 밭 248.3㎢에 비하여 각각 82.7%와 73.5%로 줄어든다. 같은 기간 청주시 지역에서 논은 절반 정도로 줄어들고, 공업 용지가 전체 면적의 4분의 1에 달하게 되는 상황을 보면, 산업 경관으로의 전이가 도심에서 활발히 일어남을 알 수 있다.

산업 경관으로의 본격적인 전이는 1969년 착공하여 1989년 4차 준공을 마친 청주공업단지에서 시작된다. 청주시 흥덕구 송정동복대동 일대에 총면적 4.1㎢ 규모로 조성되었으며, 중소 제조업이 주를 이루게 된다. 이후 1979년 럭키[현 LG화학] 청주공장이 기공되었고, 1992년 오창과학산업단지가 기공되어 2002년 준공되었으며, 2008년 오송생명과학산업단지가 준공되었다. 2024년 청주테크노폴리스가 준공 예정이다. 그리하여 청주시 흥덕구에 해당하는 미호평야 서쪽 상당 부분의 경관에서 더 이상 목가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는 없게 되었다. 산업 단지의 조성은 인구 유입·증가로 이어지게 되었고 또 다른 경관상 변화를 유발하게 된다. 산업화가 시작되던 1970년대 초보다 2배 넘는 인구가 거주하면서 마천루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 아파트 단지가 경관을 압도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이 거주하기 시작한 이래로, 미호평야의 경관은 때로는 소소하게 때로는 획기적으로 변화하여 왔다. 특별한 규칙성을 찾기는 어렵지만 변화가 점점 더 빨라졌다는 점은 분명하다. 전근대는 물론 현대 초까지도 농업 경관이 우세하였으나, 그런 중에도 도시 경관이 점차 그 세를 더하여 갔고, 1970년대 이후 급속히 산업 경관으로 전이하였다. 정보 및 생명공학을 기반으로 한 산업 구조 개편이나 인구 구조의 변화, 삶의 질 개선에 대한 주민의 요구는 미호강미호평야의 경관을 또 다른 방향으로 바꾸어 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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