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3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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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政治 |
영어공식명칭 | Politics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안성호,손경찬 |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주권자인 국민이 국가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
[개설]
정치란 지역적으로는 주민 참여 속에서 시민의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며,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중앙과의 연계 속에서 청주시가 국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일을 추진하는 일체의 정치적 행위를 의미한다.
[고대]
서기 3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 청주 지역은 한반도 서북부에 있었던 낙랑 문화의 영향을 일부 받으면서 토착 세력 집단이 성장하고 있었다. 청주 지역과 주변 지역에 정치 세력이 형성되어 갔음을 알려 주는 유적으로는 청원군 상평리[현 청원구 오창읍 상평리]와 진천군 송두리 유적 등이 있다. 이들 유적은 모두 마한과 관련된 유적이며 이 시기 미호강 유역의 농업 경제를 기반으로 국읍이 성장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청주를 포함한 충청북도 지역은 삼국 간의 항쟁기에 중요한 쟁패 지역이었다.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데다가 소백산맥의 관문인 죽령(竹嶺)·계립령(谿立嶺)·조령(鳥嶺)·추풍령(秋風嶺) 등을 통하여 한반도의 요충지인 한강 유역으로 진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삼국 간의 세력 각축장이 되었다.
[고려 시대]
청주에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호족 세력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청주는 후삼국 건국 세력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특히 궁예(弓裔)와 왕건(王建)의 정권교체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왕건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해 가는 과정에서 청주인들 간의 분열을 야기한 이른바 ‘아지태(阿志太)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아지태 사건은 친왕건파 성립의 계기가 되어 궁예 정권이 붕괴하는 결정적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후 고려를 건국한 왕건과 후백제 견훤(甄萱) 간의 930년 고창[현 경상북도 안동시 일대] 전투를 계기로 왕건의 세력이 강해지자 충청도 일대의 호족 세력들도 점차 왕건에게 귀부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양국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매곡현[현 보은군 회북면]의 성주 공직(龔直)의 귀부였다. 청주 일대도 고려의 세력권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려는 983년(성종 2)에 처음으로 지방에 외관을 파견하여 본격적인 통제를 하기 시작하였으며, 지금의 충청북도 지역을 청주목과 충주목으로 나누어 청주목에 2군 7현을 두었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이 난을 일으켜 이후 100년에 걸친 무신정권이 시작되었고, 청주 출신인 경대승(慶大升)이 정중부 부자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기도 하였다. 무신정권기에 중앙 귀족들은 전국적으로 토지를 빼앗아 경작하고 지방 관리들이 농민과 천민들에게 가혹한 수취와 역역 동원을 가중시켜 곳곳에서 민란이 발생하였다. 많은 청주인들도 농민 반란군에 합세하였다.
[조선 시대]
1393년(태조 2) 11월 각도의 계수관(界首官)을 정할 때 청주는 광주·충주·공주·수원과 함께 양광도 계수관의 하나가 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를 보면 고려 시대보다 소속 군현이 크게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고려 말에 청주목에서 경복흥(慶復興)과 같은 실력자를 배출하였고, 청주에 본관을 둔 정총(鄭摠)·정탁(鄭擢)·한상경(韓尙敬)이 개국공신으로 녹훈되어 청주의 위상이 높아진 것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1444년(세종 26)에는 왕이 청주의 초수리 행궁에 4개월 이상 머물면서 안질을 치료하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제반 정무가 왕에게 보고되어 처리되었으므로 왕이 머무는 동안 청주는 임시 수도와 같은 기능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세종의 초정 요양을 계기로 청주의 지역적 위상은 크게 높아졌고 지역 인사들도 중앙의 고관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1453년(단종 원년) 10월 수양대군은 쿠데타를 일으켜 김종서(金宗瑞)와 안평대군 등을 제거하고 1455년 단종의 왕위를 강탈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때 세조(世祖)의 즉위를 도운 정난공신 43명 가운데 한확(韓確)과 한명회(韓明澮) 등 청주 지역에 본관을 둔 사람이 9명이나 포함되어 청주권 출신 세력이 커다란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대 사회]
이승만(李承晩) 독재 정권의 파행적 국정 운영이 계속되자 1960년 청주농업고등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반독재 시위가 일어났다. 또한 청주 시민과 대학생들은 4·19혁명 대열에 참여하여 민주주의 정착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1961년 5·16쿠데타를 통하여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다시금 국가 권력이 주도하는 정치 체제를 이끌어 갔고 국민들은 일방적인 동원 대상이 되었다. 12·12 군사 쿠데타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며 전두환 신군부가 등장하자 전국적으로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198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청주 지역도 예외 없이 대학생과 종교 단체, 노동 단체, 그리고 시민들이 민주화 투쟁에 참여하였다.
영호남에 형성된 지역 갈등적 정치 구도가 여권 엘리트 연합의 붕괴로 무너지고 충청북도가 새로운 정치권으로 독립하였는데, 이는 한국 정치의 갈등 구조가 시장 민주주의적 패턴으로 진행하여 가는 조짐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 같은 청주인들의 새로운 의사 표현은 또 다른 지역 구도의 심화와 함께 지역적 정치 문화를 강화하는 고질적 문제가 되기도 하였지만, 특정 정당에 강력한 귀속감을 보이지 않고 고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청주 시민들의 정치 문화는 현대 사회에서 민주주의 발전의 한 표상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전국 선거에서 민심의 향배를 보려면 청주 지역 표심의 향배를 살펴보라는 말처럼 민주주의와 정당 정치의 꽃인 선거에서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투표 성향을 보이는 청주 지역 유권자의 의식은 한국 정치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