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1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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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正熙 政權 - 民主化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수룡 |
[정의]
박정희 정부 시기부터 노태우 정부 시기까지 전개된 반독재 민주화 운동.
[박정희와 반유신운동]
5·16쿠데타로 박정희가 집권한 이후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는 군사 독재를 청산하기 위한 투쟁으로 집약되었다. 청주 지역 민주화 운동 세력 또한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1967년 5월 재선에 성공한 박정희는 한 달 뒤에 치러진 총선에서 대대적인 부정을 자행하였다. 당시 헌법에 규정된 3선 중임 제한을 풀기 위하여 개헌선인 2/3 이상의 의석 확보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7월 15일에는 세광고등학교 학생 150명이 학교 정문에서 부정 선거 규탄 투쟁을 벌였고, 7월 3일에는 충북대학교와 청주대학교에서 6·8 총선을 규탄하는 시위가 발생하였다.
6·8 총선으로 개헌 의석을 확보한 박정희는 1968년부터 3선 개헌을 위한 수순을 밟아 나갔다. 야당이 강력히 반발하는 가운데 충북에서도 8월 ‘3선개헌반대투위 충북지부’가 결성되었다. 9월 8일에는 충북대생 200여 명과 청주대생 150여 명이 각각 시위를 벌였으며, 9일에도 충북대생 500여 명이 종합운동장에서 성토 대회를 가졌다.
1971년 4월 제7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를 가까스로 이기고, 5월 총선에서도 신민당에게 참패한 박정희는 1972년 10월 유신을 선언하였고, 이후 유신헌법과 유신헌법에 근거한 유신체제가 출현하였다. 1970년대 내내 유신 체제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이어지는 가운데 청주 지역에서도 저항에 동참하는 인사들이 있었다. 1975년 2월 28일 충북 지역 야당과 재야 인사들은 ‘민주회복국민회의’의 지역 조직에 참여하였다. 1977년 11월 내덕동 성당에서는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주최로 50여 명의 신부와 30여 명의 수녀, 100여 명의 신자가 모여 시국기도회를 개최하였으며, 충북 지역 신부들은 1978년 6월 광화문 시위에도 참여하였다. 개신 교회도 반독재 운동에 참여하여 한국기독교장로회청년회 충북연합회 회원들은 1976년 8월 목포에서 개최된 전국청년대회 및 1977년 서울 대회, 1978년 전주 대회 등에 참여하였다.
[5·18민주화운동에서 6월항쟁까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급작스런 사거로 유신 체제는 붕괴되었다. 그러나 12·12 쿠데타를 통하여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은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무차별 학살로 진압하였다. 청주에서는 1982년 5월, 충북대·청주대·서원대 3개 대학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계획하다 사전 발각으로 실패하였다. 1983년 8월 12일에는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 전국대회가 청주에서 개최되어 600명이 참석한 가운데 무려 400명이 연행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1985년 4월에는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청주가톨릭농민회, 충북기독교농민회, 충북민주청년회 등이 망라된 ‘충북민주화운동협의회’가 발족하였다. 이 외에도 1985년에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독재 정권 퇴진과 민주 회복을 위한 시위가 이어졌다.
1986년 1월 전두환이 ‘88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구실로 개헌에 관한 논의를 금지하자, ‘민주화추진협의회’와 신민당은 2월 ‘대통령 직선제 개헌 1천만 서명 운동’에 돌입하였다. 청주에서도 3월 27일 ‘충북민주헌법쟁취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고, 대학생의 시위와 교수들의 시국 선언 등이 이어졌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발생하고, 4월 13일 전두환이 이른바 ‘호헌 조치’를 발표하자 전국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은 절정에 달하였다. 5월 서울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자 충북에서도 지부가 조직되었다.
충북 지역의 6월 민주항쟁은 국민운동 충북본부의 주도 하에 전개되었다. 6월 10일 육거리 제일교회에서 ‘고문 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를 위한 충북도민 실천 대회’를 개최하고 가두시위를 벌였고, 6월 18일에도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이날 충북대학교에서 시작된 시위는 저녁 무렵 1만 명 규모로 커졌고, 시위대는 민정당사, 우체국, 파출소 등을 습격했다. 26일에는 전국 곳곳에서 국민평화대행진이 전개되었는데, 이날 전국적으로 100만여 명의 시민이 참여한 가운데 청주에서도 5,000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도민평화대행진이 석교동 육거리에서 열렸다.
[현황]
국민적 저항에 직면한 전두환 정권은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하는 6·29선언을 발표하였지만, 이어 실시된 12월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영삼·김대중 양김의 단일화 실패로 인해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완전한 민주화의 성취를 과제로 남긴 민주화 운동 세력은 광주학살 진상 규명과 5공 비리 규탄을 중심으로 투쟁을 이어 갔다. 그리고 조직적 활동을 위하여 1988년 4월에는 국민운동 충북본부 총선거투쟁위원회와 청주지역 민주청년연합이 결성되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성과를 바탕으로 1988년부터 1992년 사이에 충북 지역 민주화운동 역량은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1988년 30여 회, 1989년 33여 회, 1990년 30여 회, 1991년 27회, 1992년 10여 회의 민주화 시위가 청주 지역 대학가와 교회 그리고 상당공원 등지에서 벌어졌다. 이와 같은 투쟁은 충북민주운동협의회, 국민운동충북본부, 청주지역 민주청년연합, 충북여성민우회, 국민연합충북본부, 충북연합 등과 같은 민주화 운동 지역 조직의 결성으로도 나타났다. 1992년 이후에도 충북 지역 민주화 운동은 여성 운동과 환경 운동을 포함한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되며 발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