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9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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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地區黨 |
영어공식명칭 | constituency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안성호,손경찬 |
[정의]
충청북도 청주 지역에 있는 각 정당에서 설치한 중앙당의 하부조직.
[개설]
지구당은 정당의 중앙당 조직과 대비된 지방의 지역 조직을 말하며, 지구당 위원장이 책임자로 관리·운영한다. 선거구를 기초로 지역 대표를 선출하는 지역구 국회의원의 수와 일치하는 지구당 수를 각 정당은 조직할 수 있다. 물론 지구당 조직 수는 정당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등록 기준에 맞는 수만 충족하면 족하다. 그러나 수권 정당이 되려는 정당은 전국 정당을 표방하며 전 지역에 지구당을 조직하려고 한다.
[목적]
현재 지방 자치 단체의 정치적인 재량권은 매우 낮다. 과거 군사 권위주의 정권 시대와 비교할 때 분권화와 민주화의 관점에서 지구당의 위상 변화가 있다. 각 당의 당헌만 보면 지구당의 대의원대회 권한이 상당한 정도로 보장되어 있고, 분권화는 어느 정도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지구당 위원장 1인이 모든 것을 전횡할 수 있고, 중앙당에서 조직책으로 임명된 자가 당연히 지구당 위원장이 되고 지구당 위원장이 모든 것을 전횡하게 되는 만큼 당헌에 보장된 분권화도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따라서 아래로부터의 풀뿌리민주주의가 지구당을 통하여 실천되는 것을 완전히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
과거 여러 정당의 당원은 대의원을 선출하지도 않으며 당직자들은 모두 중앙당에서 임명하고 공직 후보의 공천도 낙하산식으로 하여 지구당에서 일하는 보람이 없어 정당에 가입하여야 하는지 본질적 의문을 갖게 하였다. 이제는 정당의 지구당이 지역의 민심을 읽을 수 있고 지역의 정치인은 지역의 주민과 당원이 선출한다는 풀뿌리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지구당 운영이 요망된다. 최근에는 상향식 당내 민주주의를 강조하면서 지구당 위원장의 경선제에 입각한 지구당의 대의원들에 의한 민주적 선출이 확산하고 있다.
2023년 현재 청주에는 상당구 지구당, 서원구 지구당, 흥덕구 지구당, 청원구 지구당 등 4개의 선거구가 있어 각 정당은 4개의 지구당을 설치하고 있다.
[연혁]
청주에서 정당의 연원은 1945년 광복 이후 해방 정국에서 나타난 건국준비위원회, 조선공산당, 한민당 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해방과 함께 정당 다원주의가 도입되어 무수히 많은 정당 조직이 출현하였다. 해방 이후 미군 진주와 함께 남한에 도입된 미국식 다원주의 정치사상과 제도가 우여곡절 끝에 단독 정부의 수립과 함께 남한의 정당정치를 이끌어가는 기본 원리로 채택되었다.
[변천]
제헌 국회의원 시기 청주시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의 최병덕, 대동청년단 소속의 민영복, 무소속의 홍원길, 서병곽, 박기운, 구연직의 선거 조직체가 있었다. 청주 지방에서는 이광, 박노태, 이명구, 박기운을 중심으로 지방조직을 가다듬었다. 청주 지방에서는 김동환, 이민우, 박노학 등이 민주국민당의 주축이었다.
제2대 국회의원 시기에는 민주국민당 소속의 김동환, 신승휴 등 2인, 대한국민당 소속의 안기환, 최병덕, 박기운, 이명식 등 4명의 선거 조직체를 갖추고 있었다. 한국청년단 소속의 최순룡, 무소속의 홍원길, 민영복, 송문교, 최동욱, 지헌모, 김교원, 최산익, 이영근 등의 선거 조직체를 갖추었다.
제3대 국회의원 시기에는 제헌 국회의원동지회의 박기운, 자유당 소속의 최순용, 무소속의 홍원길, 김춘성, 안성웅, 한찬구, 홍순택의 조직체가 있었다.
제4대 국회의원 시기에는 여당인 자유당 소속의 이명구와 야당인 민주당의 이민우의 지구당 사무실이 있었다. 무소속의 박기운, 최순용, 최병길, 이춘성, 홍원길 등은 선거 때 선거 사무실을 두었다. 제4대 국회의원 선거는 1958년 5월 2일 실시되었고 청주시 선거에서는 7명의 후보자가 경합을 벌였다.
제5대 국회의원 시기에는 사회대중당 소속의 김춘성, 민주당 소속의 이민우의 지구당이 있었다. 무소속의 최병길, 최순용, 홍원길, 김상린의 선거 사무실이 선거 때 있었다. 참의원에는 민주당 소속의 박기운, 박찬희, 송필만 3인이 있었고, 자유당의 오범수가 참의원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는데, 민주당과 자유당은 각각 지구당 사무실을 운영하였다. 과도정부는 7월 29일 민의원과 참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 조각에 착수한 신·구파 영수회의는 완전 결렬되어 1961년 2월 20일 구파가 신파와 결별하고 신민당을 발족하게 되었다. 청주에서도 자유당과 격렬한 투쟁을 벌였던 민주당이 신파의 서병주계와 구파의 이민우계로 분열되었다.
제6대 국회의원 시기 청주시는 충청북도의 제1선거구로서 42개 투표구로 나뉘어 투표가 실시되었다. 지역구에서는 신민당의 유부성, 자유민주당의 홍원길, 국민의당의 최병길, 보수당의 김창수, 민주당의 서병주, 민정당의 이민우, 민주공화당의 정태성 등이 지구당을 운영하였다. 주로 선거 때 선거 사무실로 활용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헌법」 제75조에 의거 1964년 6월 3일 오후 8시를 기하여 서울특별시 일원에 걸친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계엄사령관에 육군참모총장 민기식 대장을 임명하였다. 7월 27일 여야 협상에서는 언론 자유 규제 강화 대책과 계엄령 해제안이 국회에 정식 발의되어, 28일 가결되었다.
제7대 국회의원 시기 청주시는 제1지구로 되었다. 지역구에서는 신민당의 최병길, 민주공화당의 정태성, 한국독립당의 안성웅, 민주당의 김진영 등이 지구당을 운영하였다. 민주공화당 청주 지역당의 변천을 보면, 1963년 8월 9일 지역당 창당을 보았고, 지역당 위원장에 박노태가 선출되고 사무국장에 이준모가 임명되었다. 1963년 8월 9일 지역당 개편 대회를 갖고 위원장에 정태성이 선출되고 사무국장에 홍재봉이 임명되었다. 1969년 5월 12일 정태성 위원장의 제명으로 지역당 위원회를 개최하여 위원장에 장덕진을 선출하고 사무국장에 오창근을 임명하였다. 1971년 2월 13일 지역당 개편대회를 갖고 위원장에 정태성을 선출하고 사무국장에 김영준을 임명하였다. 1973년 1월 11일 「정당법」 및 「선거법」 개정으로 청주시·청원군이 통합되어 충청북도 제1선거구가 되었으며, 당의 공천을 받은 민기식이 위원장이 되었고, 사무국장에 김필현이 임명되었다.
제8대 국회의원 선거는 1971년 5월 25일 실시되었다. 청주의 지역구에서는 민주공화당의 정태성, 신민당의 최병길, 국민당의 성백준, 민중당의 정현우, 통일사회당의 최동현 등이 출마하였으며, 선거를 위하여 지구당을 운영하였다. 평상시에는 당의 조직 확대를 위하여 지구당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72년 12월 27일 장기 독재 집권을 알리는 유신헌법 공포식이 있었다. 충청북도는 4개 선거구로 나뉘었고 청주시와 청원군을 합하여 제1선거구가 되었다. 제9대 국회의원 선거는 1973년 2월 27일 실시되었다. 제1선거구에서는 민주공화당의 민기식, 신민당의 이민우, 민주통일당의 김현수 등이 선거에 출마하였고, 평상시 지구당을 책임지고 운영하였다.
유신체제하에서 두 번째 실시된 제10대 선거는 여소야대 정국을 만들었다. 청주는 반유신의 의지를 확산하여 야당 의원을 2명씩이나 당선시키는 선구자적인 민주 시민 의식을 보여 주었다. 청주·청원 제1선거구에서는 민주공화당의 민기식, 신민당의 이민우, 민주통일당의 김현수 등이 지구당을 운영하였으며, 선거 때는 선거 사무실로 활용하였다. 무소속의 오범수도 선거 사무실을 운영하였다.
10·26사태와 12·12군사반란, 5·17내란과 5·18민주화운동을 보는 시각은 일부는 사태를 지켜보는 입장이었으나, 민주적 시민으로서 단호한 역사적 평가를 내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는 데는 대다수가 동의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제5공화국하 청주 지역에서의 선거를 보면 지지도에 있어서는 동조적인 결과를 보여 주었다. 제5공화국하에서 처음 실시된 제11대 국회의원 선거는 1980년 10월 22일 중선거구제로 실시되었다. 청주·청원 제1선거구에서는 한국민주당의 윤석민, 민권당의 김우현, 민주정의당의 정종택, 신정당의 박학래, 사회당의 장기평, 민주한국당의 신경식, 민주사회당의 이종문, 민주농민당의 변종석 등이 지구당을 운영하였다. 무소속의 이경동은 선거 사무실을 운영하였다. 1980년 11월 25일 「정치 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 조치법」에 따라, 835명 가운데 268명이 정치 활동 적격자로 판정되어 규제 대상에서 제외된 유치송 등이 12월 1일 민주한국당 창당 발기인 대회를 가졌다. 1981년 1월 21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정당 등록을 신청하였다. 충청북도는 청주시·청원군 제1지구당에 신경식, 충주시·중원군·제원군·단양군 등 제2지구당에 김영준, 진천군·괴산군·음성군 등 제4지구당에 허탁이 선출되었다. 제12대 대통령선거에 대비하여 1월 23일 신경식을 충북선거대책지부장으로 선정하였다. 2월 11일 실시한 대통령 선거 결과 충청북도는 유효 투표수 256표 중 14표를 얻었다. 1981년 3월 25일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비하여 민한당은 지역구 후보자를 3월 5일 공천하였다. 충청북도는 청주시·청원군에 신경식, 제천시·중원군·제원군·단양군에 김영준, 보은군·옥천군·영동군에 정선영, 진천군·괴산군·음성군에 허탁을 정하였다. 선거 결과 충주시·제천시·중원군·제원군·단양군의 김영준 후보만 당선되었다. 신정당의 김갑수는 1월 29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하였으나 충청북도는 한 지구당도 등록을 못 하였다. 1981년 2월 27일 청주시·청원군에 박학래가 후보로 등록되었다. 그러나 낙선하였고 2명만 당선되었다. 신정당은 3월 24일 민주사회당과 합당하기로 결정하였다. 청주갑에서는 이윤영 후보가, 청주을에서는 유병두 후보가 나왔으나 모두 패배하였다. 제14대 총선에서 지역구 111명, 전국구 14명의 후보를 냈다.
제12대 국회의원 시기 신한민주당은 1984년 11월 30일 단행된 3차 해금으로 신당 창당 작업이 본격화되었다. 1985년 1월 18일 신한민주당은 창당대회를 열고, 1월 21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정당 등록을 하였다. 1985년 2월 12일 제12대 총선에서 충청북도는 청주시·청원군 제1지구당에 김현수를 공천하여 당선시켰고, 충주시·제천시·중원군·단양군에서도 이택희 후보가 당선되었다. 소위 신당 바람으로 29.26% 득표율로 지역구 50석, 전국구 17석 등 67석을 얻어 제1야당이 되었다. 이민우 총재는 전두환 대통령에 대하여 임기 전 퇴진을 요구하였다. 총선 후 민한당 소속의 국회의원이 입당하여 102석의 거대 야당이 되었다. 1986년 2월 7일 김영삼 민추협공동의장이 입당하였고, 대통령직선제 1000만 개헌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11일부터 개헌추진시도지부가 청주대회를 거쳐 5월 3일에는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5·3 인천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5월 8일 김영삼, 김대중은 신당 창당을 공식 선언함으로써 분열되었다. 이로써 신당인 통일민주당에 이어 제3당이 되었고, 1988년 4월 26일 실시된 제13대 총선에서 청주는 공천하지 못하였고, 선거 결과 유효 투표수의 0.24%를 얻었다. 전국적인 신당 바람에도 불구하고 청주에서는 여당 성향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어 전국적인 민주화 열기에 부응하지 못하였으나 신한민주당의 김현수 후보가 2위 득표율을 보였다. 청주시·청원군 제1선거구 결과 한국국민당의 이경열, 민주한국당의 신경식, 신한민주당의 김현수, 민주정의당의 정종택 등이 지구당 위원장이 되어 지구당을 운영하였다. 소위 1986년 12월 24일 이민우 구상 파동과 함께 신한민주당은 분열하여 신당이 창당되었다. 마침내 1987년 4월 8일 김영삼 고문과 김대중 의장이 신당 창당을 선언함으로써 소속 의원 90명 중 78명이 탈당하여 4월 29일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였다. 민주한국당은 1985년 2월 12일 제12대 총선에 대비하여 1월 8일 공천을 완료하였다. 청주시·청원군은 신경식, 충주시·제천시·중원군·제원군·단양군은 김영준, 영동군·보은군·옥천군은 이용희, 괴산군·진천군·음성군은 오성섭을 선출하였다. 선거 결과 이용희 후보만 당선되었다. 한국국민당은 1981년 1월 23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하였다. 충청북도는 청주시·청원군 제1지구당에 부총재인 윤석민을 선출하였고,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천을 받아 당선되었다. 1985년 2월 12일 제12대 총선에서는 청주시·청원군에 이경렬을 공천하였다. 그러나 이경렬 후보는 낙선하고, 충청북도에서는 괴산군·진천군·음성군의 김완태 후보만 당선되었다. 1985년 3월 22일 제3차 정기전당대회에서 이만섭 의원을 총재로 선출하였다. 1981년 2만 216명이었던 충청북도의 당원 수는 1987년 4,971명으로 줄었다. 1988년 4월 26일 제13대 총선에서 충청북도는 1명도 공천하지 않았고, 원외 정당이 되어 「정당법」 제38조 제1항 제3호 규정에 의하여 등록을 취소하였다. 이후 1985년 5월 26일 신정사회당과 합당하기로 하였다. 통일민주당은 제14대 총선에서 청주갑에서 김진영 후보가 당선되었다. 청주을에서는 후보를 내지 않았다. 제14대 총선에서 지역구 189명, 전국구 32명의 후보를 냈다. 정주영 대표가 5월 15일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11월 7일 3대 국정 목표, 12대 정책 방향, 50개 중점 공약 등 14대 대선 공약을 확정하였다.
제13대 국회의원 시기 청주시는 청주갑과 청주을 선거구로 분구되어 각 정당은 각각 2개의 지구당을 운영하였다. 청주갑 선거구는 민주정의당 정종택, 한국민주당의 김현수, 평화민주당의 이관복, 신민주공화당 김진영 등이 지구당을 운영하였다. 청주을 선거구는 민주정의당 조성훈, 통일민주당 정기호, 평화민주당 고영태, 신민주공화당의 오용운, 민중의당 김재수 등이 각각 지구당을 운영하였다. 통일민주당은 1987년 5월 1일 창당대회를 갖고, 5월 6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정당 등록을 하였다. 충청북도는 제1지구당 청주시·청원군에 김현수 의원이 등록하였다. 1987년 충청북도의 당원 수는 3,742명이었다. 김현수는 당내 대외협력위원장, 정책의장을 역임하여 당 5역이 되었다. 통일민주당은 1988년 4월 26일 제13대 초선에 청주갑에 김현수를, 청주을에 정기호, 청원군에 박종진을 공천하였으나, 충청북도에서는 단 1명도 당선되지 않았다. 그리고 지역구 46석, 전국구 13석 등 총 59선을 얻어 제3당이 되었다. 1988년 2월 8일 야권의 신속한 단일화를 이유로 김영삼 총재는 총재직 사퇴를 발표하였다. 평화민주당은 1987년 11월 12일 창당대회를 갖고, 11월 13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정당 등록을 신청하였다. 등록 시에는 김현수가 청주시·청원군에 지구당을 등록하였다. 그러나 제13대 총선 공천에서는 청주시갑 이관복, 청주시을에 고영태가 후보로 나섰다. 6·29선언 이후 김종필은 1987년 9월 28일 정계 복귀를 공식 선언하고, 10월 30일 신민주공화당 창당대회를 열고, 11월 9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정당 등록을 신청하였다. 1987년 충청북도의 당원 수는 6,295명이었고, 등록 시 오용운은 청주시·청원군 지구당에 등록하였다.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는 청주시갑에 김진영, 청주시을에 오용운, 청원군에 윤석민을 공천하였고, 총선 결과 지역구 27석, 전국구 8석 등 총 35석을 얻었고, 청주시을에서 오용운 후보와 충주시, 중원군에서 이종근 후보가 당선되었다.
제14대 선거는 1992년 3월 24일 실시되었다. 청주시갑 선거구에서는 민주자유당의 정종택, 민주당 장한량, 통일국민당의 김진영, 신정당의 이윤영이 지구당 위원장이 되어 지구당을 운영하였고, 무소속의 이경동은 선거 사무실을 두었다. 청주시을 선거구에서는 민주자유당 임광수, 민주당 정기호, 신정당 유병두 등이 지구당을 운영하였다. 1990년 1월 22일 청와대에서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3당은 합당을 감행하여 민주자유당을 창당하였다. 2월 9일 3당 합당 의결하였다. 1991년 2월 16일 수서 택지 분양 사건과 관련하여 오용운 의원 등 5명이 구속되었다. 1992년 3월 24일 제14대 총선에서 지역구 116석, 전국구 33석 등 149석으로 과반수 미달하였다. 청주갑에서 정종택 후보가 나왔으나 2등으로 패배하였다. 청주을에서는 임광수 후보가 나왔으나 역시 패배하였다. 제14대 총선에서 지역구 237명, 전국구 54명의 후보를 냈다. 1992년 대선 때 공을 세운 민주산악회는 청주갑 지구의 김동진 지부장, 청주을 지구의 곽달영 지부장이 활동하였으나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해체되었다.
민주당은 1990년 6월 15일 이기택을 중심으로 민주당 창당전당대회를 개최하였다. 청주갑에는 장한량 후보가 3등으로 패배하였으나 새로운 인물로 주목받았다. 청주을에서는 정기호 후보가 당선되었다. 제14대 총선에서 지역구 225명, 전국구 50명의 후보를 냈다. 1991년 2월 재야의 이부영 등 68명이 입당하였고, 2월 3일 이기택을 총재로 선출하였다. 1991년 9월 7일 김대중·이기택은 민주당과 통합 협상을 하여 9월 16일 통합야당 민주당이 출범하였다. 1992년 3월 24일 제14대 총선에서 지역구 75석, 전국구 22석 등 97석을 확보하였다. 1992년 3월 24일 실시한 제14대 총선에서 청주갑에서는 5명, 청주을에서는 4명의 후보자가 출마하여 청주갑에서는 통일국민당의 김진영 후보가, 청주을에서는 민주당의 정기호 후보가 당선되어 청주시는 모두 야당 후보가 당선되는 야성 도시임을 과시하였다. 청주시에서 민주자유당은 6만 9286표, 민주당은 8만 1425표, 통일국민당은 3만 540표, 선정당은 9,555표, 민중당은 5,871표, 무소속은 4,479표를 얻었다. 자유민주연합은 1995년 3월 30일 창당대회를 열고, 5월 16일 신민당과 당대당의 야당 통합을 하였다. 8월 11일 22석의 의석을 확보하였다. 상당구의 구천서 의원, 흥덕구의 오용운 전 의원은 과거 수서 택지 분양 사건과 무관함을 강조하고 노병은 죽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자민련의 경우 주병덕 지사의 탈당과 도지부장인 김진영 의원의 공천 탈락, 김현수 시장의 「선거법」 위반 조사 등에서 불구하고 녹색 바람이 점차 거세졌다. 1996년 구천서 의원은 자민련 충북도지부 위원장이면서 당무위원을 역임하였다. 충북도지부 사무처장은 유철웅이 맡았다. 1995년 7월 18일 김대중의 정계 복귀와 국민회의 신당 창당을 선언하였다. 청주갑의 장한량, 청주을의 국민회의의 손종학은 지역 구도를 타파하고자 노력하였다. 제15대 총선은 1996년 4월 11일 실시되었다. 청주시갑구, 청주시을구에서 선거구가 상당구와 흥덕구로 변경되어 실시되었다. 평상시 신한국당, 국민회의, 민주당, 자민련의 4당의 지구당이 운영되었고, 선거를 앞두고 창당된 무정파전국연합, 무당파국민연합, 대한민주당, 21세기한독당, 정명당, 친민당, 통일한국당 등도 지구당을 창당하여 사무실을 운영하였다. 청주 상당구에서는 신한국당의 홍재형, 국민회의의 장한량, 민주당의 신창민, 자민련의 구천서 등이 지구당 위원장이 되어 지구당을 운영하였다. 무당파국민연합의 채영만, 무소속의 김영길, 이경동, 이정균 등이 선거 시기 전후에 선거 사무실을 운영하였다. 청주 흥덕구에서는 신한국당의 윤석민, 국민회의의 손종학, 민주당의 정기호, 자민련의 오용운 등이 지구당 위원장으로 지구당을 운영하였다. 무당파국민연합의 이성일, 무소속의 최현호 등이 선거 때에 선거 사무실을 운영하였다.
한나라당의 1999년 충북도지부위원장은 김영준 의원, 사무처장은 최연호였다. 2002년 충북도지부위원장은 신경식 의원, 사무처장은 이원호였다. 2004년 충북도당위원장은 송광호 전의원, 사무처장은 송태영이었다. 상당구 지구당은 윤의권이, 흥덕갑 지구당은 윤경식 전 의원이, 흥덕구을 지구당은 남상우 전 정무부지사가 맡아 제17대 총선에서 후보자로 공천을 받았다. 새천년민주당의 1999년 충북도지부장은 이용희 전 의원, 사무처장은 남봉현이었다. 2002년 충북도지부장은 홍재형 의원, 사무처장은 조부제였다. 자유민주연합의 1999년 충북도지부장은 어준선 의원, 사무처장은 유철웅, 조직부장은 김대식이었다. 2002년 충북도지부위원장은 정우택 의원, 사무처장은 유철웅, 조직부장은 김대식이었다. 2000년 4월 13일 제16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상당구에서는 한나라당의 한대수, 민주당의 홍재형, 자민련의 구천서가 지구당 위원장으로 지구당을 운영하였다. 흥덕구에서는 한나라당의 윤경식, 민주당의 노영민, 자민련의 조성훈, 한국신당의 장석봉, 무소속의 최현호 등이 지구당이나 선거 사무실을 운영하였다. 제17대 총선이 2004년 4월 15일 실시되어 청주시는 상당선거구 외에, 흥덕선거구가 흥덕갑선거구, 흥덕을선거구로 분구되어 3개 선거구에서 실시되었다. 청주시 상당선거구 한나라당의 윤의권, 새천년민주당의 채영만, 열린우리당의 홍재형, 자민련의 김진영, 녹색사민당의 천상관, 민주노동당의 윤성희 등이 지구당이나 선거 사무실을 운영하였다. 청주시 흥덕갑 선거구에서는 한나라당의 윤경식, 열린우리당의 오제세, 자민련의 최현호, 민주노동당의 배창호, 무소속의 김학인 등이 지구당이나 선거 사무실을 운영하였다. 청주시 흥덕을선거구에서는 한나라당의 남승우, 열린우리당의 노영민, 자민련의 박동찬 등이 지구당 위원장으로 선거 사무실을 운영하였다.
[현황]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으로 나온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2003년 노무현 대통령과 정치적 노선과 코드가 같은 정치인들이 민주당을 탈당하여 열린우리당을 설립하였다. 청주에서도 상당지구당에는 홍재형, 흥덕지구당에는 노영민 등이 지구당을 창당하였다.
제17대 총선에서 흥덕구가 분구되면서 흥덕갑지구당은 오제세, 흥덕을지구당은 노영민이 지구당 위원장을 맡았고, 오제세와 노영민은 제17대 총선에서 모두 당선되어 국회의원이 되었다. 충북도당 위원장은 홍재형 의원, 사무처장은 조부제였다. 한국의 정당 활동은 중앙당 중심으로 이루어져 제왕적 총재로 운영되며 지구당은 중앙당의 등록을 위한 필요에 의하여 창당하거나 선거 운동에 활용하는 또 하나의 선거 운동 조직과 기구에 불과한 것이 사실이었다. 여전히 기초단체장, 광역의회의원, 기초의회의원의 추천권이 지구당에서 결정되지 않고 있다. 항상 지방 자치 선거 때마다 지구당 내에서의 민주적 절차에 의한 공천자 결정 과정에 승복하지 않는 등 공천의 문제가 발생하여 각 정당에서 탈당과 당원들 간의 비난이 오가고 있다. 그동안 정치인들의 부정부패는 대부분 지구당 운영을 위하여 불가피하게 저지른 것으로 치부되었다. 지구당 위원장의 선출은 상향식으로 철저하게 지역민들의 의사가 민주적으로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향후 지구당 존폐 여부 활동 방안, 저비용 운영 방안 등이 정치권에서 보다 심도 있게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