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9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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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政黨 |
영어공식명칭 | political party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안성호,손경찬 |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일정한 정치 이상의 실현을 위한 정치권력의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 단체.
[개설]
오늘날 민주 정치는 정당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정당정치를 한다. 대의제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는 정당이 필수불가결한 존재이고 국가와 시민 사회를 연결하여 주는 매개 역할을 수행한다. 정당은 선거에 후보자를 내세워 당선시킴으로써 공직에 앉히고 권력을 획득하려고 노력하는 집단이다. 정당은 공직을 차지한 원내 정당과 그렇지 못한 원외 정당으로 구분된다. 정당에는 내부적으로 조직, 정책, 선전, 총무, 재정, 인권, 훈련, 청년, 부녀 등의 부서를 두어 전 국민을 대상으로 국민의 여론을 정책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을 한다. 정당은 주로 정치권력을 장악한 집권 여당과 정치권력을 획득하지 못한 소수 야당으로 구분된다. 정당 활동을 시대적으로 요약하면, 조선 시대에 있어서는 사색 붕당 싸움이었고, 조선 후기는 보수파와 개화파의 갈등이었으며, 일제 강점기는 망명지의 환경 여건에 따라 파벌과 의견 차이는 있었으나 조국 광복을 위한 투쟁이었고, 8·15해방 이후는 좌우의 대립이었으며, 정부 수립 후는 여야의 대결이었다. 정당 수립 후 선거 때마다 수많은 정당이 명멸하였다.
[형성]
청주에서 정당의 연원은 1945년 광복 이후 해방 정국에서 나타난 건국준비위원회, 조선공산당, 한민당 등으로부터 시작된다. 해방과 함께 정당 다원주의가 도입되어 무수히 많은 정당 조직이 출현하였다. 1950년대 청주 지방에서는 한국민주당 중심으로 천종구, 이희준, 박노한 등이 있었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구연직, 홍순복, 장웅두, 김동환, 정운승, 김동벽, 한정구가 중심이었다. 대동청년단은 박기운, 민영복이 주축이었으며, 전국학생연맹은 이종찬, 김진영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자유당은 1952년 4월 25일 실시한 시·군·면 선거와 5월 10일 실시한 도의원 선거를 통하여 당의 세력을 확장하는 한편 원외 세력도 확대하였다. 청주 지방에서는 이광, 박노태, 이명구, 박기운을 중심으로 지방 조직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민주국민당은 원외 자유당 잔류파와 민우회 일부 등과 함께 ‘국무원책임제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1952년 4월 17일 123명이 서명한 개헌안을 제출하여 차기 대통령에 이시영이나 장면을 추대시킬 기세로 대립하였다. 장면 내각은 집권 후 9개월간 의도하였던 정국의 안정을 위하여 마련한 3개년 경제 계획도 실천하여 보지 못한 가운데 극도의 사회적 혼란 속에 5·16군사정변으로 제2공화국의 막을 내렸다.
[변천]
청주에서도 자유당과 격렬한 투쟁을 벌였던 민주당이 신파의 서병주계와 구파의 이민우계로 분열되었다. 민주공화당은 1963년 8월 31일 제3차 전당대회에서 박정희 소장을 총재로 추천하고, 제5~제7대에 걸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고, 제6~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승리하였으나, 야당 탄압과 언론 탄압은 더욱 가속되었다. 민주공화당 청주 지역당의 변천을 보면, 1963년 8월 9일 지역당 창당을 보았고, 지역당 위원장에 박노태가 선출되고 사무국장에 이준모가 임명되었다. 1963년 8월 9일 지역당 개편대회를 갖고 위원장에 정태성이 선출되고 사무국장에 홍재봉이 임명되었다. 1969년 5월 12일 정태성 위원장의 제명으로 지역당위원회를 개최하여 위원장에 장덕진을 선출하고 사무국장에 오창근을 임명하였다. 1971년 2월 13일 지역당개편대회를 갖고 위원장에 정태성을 선출하고 사무국장에 김영준을 임명하였다. 1973년 1월 11일 「정당법」 및 「선거법」 개정으로 청주시와 청원군이 통합되어 충청북도 제1선거구가 되었으며, 당의 공천을 받은 민기식이 위원장이 되었고, 사무국장에 김필현이 임명되었다. 10·26사태와 12·12군사반란, 5·17내란과 5·18민주화운동에 대하여 일부는 사태를 지켜보는 입장이었으나, 민주적 시민으로서 단호한 역사적 평가를 내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는 데는 대다수가 동의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청주 지역은 제5공화국하에서의 선거를 통하여 보면 지지도에 있어서는 동조적인 결과를 보여 주었다. 1981년 3월 25일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비하여 민한당은 지역구 후보자를 3월 5일 공천하였다. 충청북도는 청주시·청원군에 신경식, 제천시·중원군·제원군·단양군에 김영준, 보은군·옥천군·영동군에 정선영, 진천군·괴산군·음성군에 허탁을 정하였다. 선거 결과 충주군·제천군·중원군·제원군·단양군의 김영준 후보만 당선되었다.
1985년 2월 12일 제12대 총선에 대비하여 1월 8일 공천을 완료하였다. 청주시·청원군은 신경식, 충주시·제천시·중원군·제원군·단양군은 김영준, 영동군·보은군·옥천군은 이용희, 괴산군·진천군·음성군은 오성섭을 선출하였다. 선거 결과 이용희 후보만 당선되었다. 1987년 당원 수는 1만 3074명이었다. 한국국민당이 1981년 1월 23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하였다. 충청북도는 청주시·청원군 제1지구당에 부총재인 윤석민을 선출하였고,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천을 받아 당선되었다. 이 밖에도 영동군·보은군·옥천군에서도 이동진이 당선되었고, 괴산군·진천군·음성군에서도 김완태 후보가 당선되어 충주시·제천시·중원군·단양군의 이종근 후보만 낙선하였다. 그러나 윤석민 의원은 1984년 11월 23일 사직하였다. 1985년 2월 12일 제12대 총선에서는 청주시·청원군에 이경렬을 공천하였다. 그러나 이경렬 후보는 낙선하고, 충청북도에서는 괴산군·진천군·음성군의 김완태 후보만 당선되었다. 1985년 3월 22일 제3차 정기전당대회에서 이만섭 의원을 총재로 선출하였다. 1981년 2만 2016명이던 충청북도의 당원 수는 1987년 4,971명으로 줄었다. 1988년 4월 26일 제13대 총선에서 충청북도는 1명도 공천하지 않았고 원외 정당이 되어 「정당법」 제38조 제1항 제3호 규정에 의하여 등록을 취소하였다. 1985년 1월 18일 신한민주당은 창당대회를 열고, 1월 21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정당 등록을 하였다. 2월 12일 제12대 총선에서 충청북도는 청주시·청원군 제1지구당에 김현수를 공천하여 당선시켰고, 충주시·제천시·중원군·단양군에서도 이택희 후보가 당선되었다. 소위 신당 바람으로 29,26% 득표율로 지역구 50석, 전국구 17석 등 67석을 얻어 제1야당이 되었다. 이민우 총재는 전두환 대통령에 대하여 임기 전 퇴진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총선 후 민한당 소속 국회의원이 입당하여 102석의 거대 야당이 되었다. 그러나 5월 8일 김영삼, 김대중 등은 신당 창당을 공식 선언함으로써 분열되었다. 이로써 신당인 통일민주당에 이어 제3당이 되었고, 1988년 4월 26일 실시한 제13대 총선에서 청주는 공천하지 못하였다. 통일민주당은 1987년 5월 1일 창당대회를 갖고, 5월 6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정당 등록을 하였다. 충청북도는 청주시·청원군 제1지구당에 김현수 의원이 등록하였다. 1987년 충북의 당원수는 3,742명이었다. 김현수는 당내 대외협력 위원장·정책의장을 역임하여 당 5역이 되었다. 통일민주당은 1988년 4월 26일 제13대 초선에 청주갑에 김현수를, 청주을에 정기호, 청원군에 박종진을 공천하였으나 충북에서는 1명도 당선되지 않았다. 평화민주당은 1987년 11월 12일 창당대회를 갖고, 11월 13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정당 등록를 신청하였다. 등록 시에는 김현수가 청주시·청원군에 지구당을 등록하였다. 그러나 제13대 총선 공천에서는 청주시갑 이관복, 청주시을에 고영태가 후보로 나섰다.
1997년 충청북도의 당원 수는 4,319명이었다. 1997년 12월 16일 실시한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는 충청북도에서 8만 3132표를 획득하였다. 1988년 3월 17일 김대중 총재는 총재직 사퇴를 선언하여 야권 통합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였다. 1988년 4월 26일 총선에서 충청북도 지역은 9,724표로 0.4%를 얻어 전멸하였다. 신민주공화당은 6·29선언 이후 김종필은 1987년 9월 28일 정계 복귀를 공식 선언하고 10월 30일 창당대회를 열었다. 11월 9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정당 등록 시 오용운은 청주시·청원군 지구당에 등록하였고, 이종근은 충주시·제천시·중원군·제원군·단양군에 등록하였다.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는 청주시갑에 김진영, 청주시을에 오용운, 청원군에 윤석민을 공천하였고, 총선 결과 지역구 27석, 전국구 8석 등 총 35석을 얻었다. 청주시을에서 오용운 후보와 충주시·중원군에서 이종근 후보가 당선되었다.
1992년 3월 24일 실시된 제14대 총선에서 청주갑에서는 5명, 청주을에서는 4명의 후보자가 출마하여 청주갑에서는 통일국민당의 김진영 후보가 당선되었고, 청주을에서는 민주당의 정기호 후보가 당선되어 청주시는 모두 야당 후보가 당선되는 야성 도시임을 과시하였다. 청주시에서 민주자유당은 6만 9286표, 민주당은 8만 1425표, 통일국민당은 3만 540표, 선정당은 9,555표, 민중당은 5,871표, 무소속은 4,479표를 얻었다. 1990년 1월 22일 청와대에서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3당은 합당을 감행하여 민주자유당을 창당하였다. 1991년 2월 16일 수서 택지 분양 사건과 관련하여 오용운 의원 등 5명이 구속되었다. 1992년 3월 24일 제14대 총선에서 지역구 116석, 전국구 33석 등 149석으로 과반수 미달하였다. 청주갑에서 정종택 후보가 나왔으나 2등으로 패배하였다. 청주을에서는 임광수 후보가 나왔으나 역시 패배하였다. 제14대 총선에서 지역구 237명 전국구 54명의 후보를 냈다. 1990년 6월 15일 이기택은 민주당 창당전당대회를 개최하였다. 청주갑에는 장한량 후보가 3등으로 패배하였으나 새로운 인물로 주목받았다. 청주을에서는 정기호 후보가 당선되었다. 민주화운동 세력은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여 김영삼 전 대통령을 따르거나 반대로 민주화 세력 통합이라는 신념으로 3당 통합에 반대하여 소수 정당인 꼬마 민주당이나 재야 생활을 하였다. 새천년민주당에 들어와서는 비주류나 원외 지구당 위원장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자유민주연합은 1995년 3월 30일 창당대회를 열었고, 5월 16일 신민당과 당대당의 야당 통합을 하였다. 8월 11일 22석의 의석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상당구의 구천서 의원, 흥덕구의 자민련 오용운 전 의원은 과거 수서 택지 분양 사건과 무관함을 강조하고 노병은 죽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자민련의 경우 주병덕 지사의 탈당과 도지부장인 김진영 의원의 공천 탈락, 김현수 시장의 「선거법」 위반 조사 등에도 불구하고 녹색 바람이 점차 거세졌다. 1996년 1월 18일 청주시장의 재경충청인 향우회에서 “오는 4월 총선에서 충청인들이 더욱더 단합하여 멍청도 핫바지라는 소리가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충청인의 자존심과 명예를 회복해야 하며 내년에 실시되는 대통령선거에서도 충청권에서 정권이 창출되기 위해서는 자민련 후보들을 모두 당선시켜 줘야 한다”는 발언을 하여 「선거법」 위반 조사를 받았다. 오용운 의원은 자민련전당대회의장을 역임하였다. 구천서 의원은 자민련 충북도지부 위원장이면서 당무위원을 역임하였다. 충북도지부 사무처장은 유철웅이 맡았다.
1995년 7월 18일 김대중의 정계 복귀와 국민회의 신당 창당을 선언하였다. 8월 11일 발기인대회를 갖고 창당준비위를 구성하였다. 민자당은 1995년 12월 초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개명하고, 4·11총선을 위하여 청주갑에 홍재형을, 청주을에 윤석민을 공천하였다.
[현안]
청주 지역에서의 각 정당은 지구당을 통하여 끊임없이 청주 시민의 요구와 아이디어를 겸허하게 수렴하고 정책에 반영하여야 한다. 청주시에서 활동하는 각 정당의 간부들은 여전히 정당의 본질과 청주 시민과의 정체성을 일치시키는 노력을 소홀히 하고 있다. 오히려 청주 시민의 의식을 정당 간부들이 담아내지 못하는 형국이며 선거 때만이 아니라 평상시 국민의 소리를 파악하는 기능을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정당정치 개혁은 무엇보다도 돈 안 드는 저비용 고효율의 정당이 되어야 하며, 사람 중심, 패거리 구조로부터 정책, 프로그램, 노선 등을 중심으로 한 정당으로의 전환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