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2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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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Fortune Teller |
이칭/별칭 | 맹격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영진,김해인 |
[정의]
충청북도 청주 지역에서 점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맹인.
[개설]
판수 는 점을 치고 경문을 외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맹인을 말한다. 때로는 일정한 무속 의례를 이끌기도 하였다. 판수라는 말의 유래는 ‘운수를 판단하여 준다’는 판수(判數)에서 온 말이라는 설을 비롯하여 알타이어(Altai語)에서 남자무당을 가리키는 박시[paksi]에서 분화한 우리말이라는 설 등이 있다. 보통 맹인이 아닌 남자무당은 ‘박수’라고 지칭하고, 점복을 전업으로 하는 눈이 먼 남자무당은 ‘판수’라고 한다.
[판수의 역사]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맹인들이 점을 치고 경을 읽고 의례를 집행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복을 빌어 주고 액을 없애 주는 것을 생계 수단으로 삼곤 하였다. 이는 중국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우리나라 고유의 풍속이다. 우리나라 맹인의 점, 곧 판수의 점은 중국에서도 용하다고 평가를 받았다.
판수 는 고려 시대의 맹승(盲僧)에서 기원을 찾기도 한다. 맹인들이 삭발을 하고 다녔기 때문에 맹승(盲僧)이라 하였는데, 이들이 점치기와 제액초복 의례를 행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천문, 지리, 역수, 점산, 측후를 담당하던 관상감(觀象監)에 나라의 길흉을 점치는 명과맹(命課盲)이라는 직책을 두고 맹인을 임명하기도 하였다. 특히 맹인들의 독경을 관할하던 사찰이자 맹인 회관이었던 명통시[明通寺]에 소속된 맹인들이 초하루와 보름에 임금과 나라를 위하여 독경(讀經)을 하고 장수를 빌었는데, 명통시는 관아를 방불하게 하여 명통시의 맹인들은 관원같이 행동하였다. 고관대작들도 명통시의 맹인들에게는 함부로 “해라”로 말하지 못하고 중인(中人) 대접을 하여 “하게”로 말하였다고 한다. ‘판수’라는 명칭이 관청 기관의 우두머리인 판사(判事)에서 나왔다는 설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명통시가 폐지되면서 많은 맹인이 민간에서 독경과 점치기로 생활하게 되었다. 이때 민간에서 점을 치거나 경을 읽어 재앙을 쫓고 복을 빌어 주는 맹인을 모두 ‘판수’라 불렀으며 또 한자로는 눈 먼 남자무당이라 하여 맹격(盲覡)이라 하였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맹인이 아니면서 무경(巫經)을 읽으며 앉은굿을 하는 경객(經客)이 등장하면서 판수는 주로 점을 치는 것을 주업으로 삼게 되었다.
[연행 방식]
앉아서 북을 두드리며 경문을 읽는 것이 판수의 의례 연행 방식이다. 경문을 독송함으로써 여러 신장들을 불러서 신장들로 하여금 객귀나 잡귀를 물리치도록 한다. 의례 때에는 먼저 집안의 방이나 대청에 경당을 차린다. 경당에 제상을 마련하고 여러 신장들의 위목을 붙인다. 북은 천장에 매달아 놓고 앉아서 두드린다. 장단은 단조로운 편이며 무복과 무구도 화려하지 않다. 무복으로는 평상복을 입고 고깔을 쓰는 정도이며 무구로는 산통·북·신장대·귀신 가두는 통 등이 있을 뿐 보통의 굿에서 사용되는 부채·칼·방울 등은 사용하지 않는다. 독경의례는 대개 해질 무렵에 시작해서 자정이 지날 때쯤 마치지만, 사례에 따라 2~3일 또는 일주일 넘게 경을 읽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는 여러 명의 판수가 와서 교대로 경을 읽는다.
[청주의 판수]
1950년대까지 청주의 판수는 주로 점치는 일을 업으로 삼았는데, 일반적으로 산통(算筒)을 흔들어 괘(卦)를 나타내는 산가지[산목(算木)]를 꺼내어 점괘를 풀어 주는 산점(算占)을 쳤다. 해방 직후까지도 청주 지역 판수의 활동은 매우 활발하였으나 6·25전쟁 이후 맹인이 아닌 ‘점쟁이’가 많이 출현하면서 판수는 거의 사라졌다.
[현황]
청주 지역에서는 지금의 상당구 남사로 117[남문로2가 92-6]에 있는 중앙공원 부근에 판수 위주의 점집이 한때 많이 분포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로는 공원 부근 거리에서 점을 보는 한두 사람 정도만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