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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3176
한자 淸州 孫秉熙 生家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의암로 234[금암리 385-2]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강민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축|증축 시기/일시 1971년 - 청주 손병희 생가 해체 보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978년 - 청주 손병희 생가 담장 보수
문화재 지정 일시 1979년 9월 29일연표보기 - 청주 손병희 생가 충청북도 기념물 제30호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청주 손병희 생가 충청북도 기념물로 변경 지정
현 소재지 청주 손병희 생가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의암로 234[금암리 385-2]지도보기
성격 전통 가옥
양식 초가
정면 칸수 4칸
측면 칸수 1.5칸
소유자 청주시
관리자 청주시
문화재 지정 번호 충청북도 기념물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에 있는 조선 후기 가옥.

[개설]

청주 손병희 생가(淸州 孫秉熙 生家)는 독립운동가 손병희(孫秉熙)[1861~1922]가 출생한 집이다. 손병희는 본관이 밀양(密陽), 초명은 응구(應九), 도호(道號)는 의암(義菴)이다. 일본 체류 시에는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썼다. 1882년(고종 19) 동학에 입문하여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1897년 3대 교주가 되었다. 1907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였고, 경술국치 후 보성전문학교와 보성중학교를 인수하여 교육에 힘썼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으로 일본 경찰에 피체된 후 서대문형무소에 복역 중 풀려났다. 이후 상춘원에서 요양 중 병사하였다. 청주 손병희 생가는 1979년 9월 29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충청북도 기념물로 변경되었다.

[위치]

청주 손병희 생가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의암로 234[금암리 385-2]에 있다.

[변천]

청주 손병희 생가손병희가 태어나서 22세 때까지 살던 살림집이다. 1971년 고증을 거쳐 원형대로 해체 보수하였고, 1978년 담장을 정비하였다.

[형태]

청주 손병희 생가는 네모꼴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북서향한 안채와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다. 헛간은 남쪽을 향하고 있다. 一자형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초가집이다. 온돌방과 부엌, 마루로 구성되어 있으며 광채가 나란히 있다. 광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우진각 초가지붕이다.

[현황]

청주 손병희 생가가 있던 금암리 385 일원은 손병희 유허지가 조성되어 있다. 충북선이 지나는 북서쪽을 바라보며 정문이 있고 정문에서 남동쪽으로 들어서면 왼쪽으로 1997년 세운 의암기념관이 있다. 정면으로 1994년 세운 의암영당(義庵影堂) 직전에 청주 손병희 생가가 있다. 손병희 유허지 정문 남쪽 구릉에는 탄생 100주년을 맞아 1962년 세운 유허비가 있다.

[의의와 평가]

청주 손병희 생가는 전형적인 농가 형식으로 건축적 가치가 있고, 교육의 장소로 의미가 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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