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6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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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상일 |
[정의]
1950년 6·25전쟁 중 충청북도 청주에서 수도사단이 북한군에 맞서 싸운 전투에 얽힌 이야기.
[개설]
6·25전쟁 중 북한군이 진천을 거쳐 미호천을 도강하여 청주 시내를 점령하자 국군 수도사단이 남일면 고은리 일대에서 치열하게 저항하였다.
[청원 전투의 전개]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하였으며, 불과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을 당한 대한민국은 전쟁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장비의 열세로 인하여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10여 일 후에는 충청북도 지역도 전쟁터가 되었다. 지금의 청주시 북쪽인 미호천 팔결다리 부근에서 시작된 공방전은 청주 시내를 거쳐 남쪽 외곽인 고은삼거리 일대까지 이어졌다. 6·25전쟁이 벌어진 이후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하여 1950년 7월 14일부터 16일까지 충청북도 청주시 일대에서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이 제1보병사단과 17연대의 지원 속에 북한군 15사단을 상대로 싸운 전투를 6·25전쟁사에서는 보통 ‘청원 전투’라 하는데, 『청주시지』에는 ‘고은리 전투’라는 명칭으로 소개되어 있다.
[전투 초기의 상황]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유엔은 즉시 군사 원조를 결정하여 유엔군사령부를 설치하고 연합군을 파견하여 한국군과 합동 작전을 펼쳤다. 일본 규슈에 있던 미군 제24사단 21연대의 2개 대대가 급파되어 북한군의 남하를 막았지만 오산에서 벌어진 첫 전투에서 북한군의 탱크에 밀려 패하고 충북 지역에 전선이 형성되었다. 이에 7월 초부터 전쟁터가 되자 충북도지사 이광이 7월 4일 청주에 소개 명령을 내리고 7일까지 철수를 명하였다. 김석원 사단장이 지휘하는 국군 제1군단 예하 수도사단은 7월 6일 진천 백곡천과 봉화산 잣고개 일대에 진지를 구축하고 북한군 제1군단 제2사단이 남하하는 길목을 막았지만, 진천을 지키지 못하고 청주의 북쪽 방어선인 미호천까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에 들어온 미군 후속 부대는 공주와 대전 방어선을 맡고, 국군은 동부의 소백산맥 지역을 방어하기로 하였다. 금강을 경계로 북한군의 남침을 지연시키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북한군은 최대의 속도로 금강과 소백산맥을 돌파하여 대전 지역을 점령한 후 전주·논산·문경·울진의 남방 지역을 해방한다는 목표로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북한군은 제15사단을 음성 지구로, 제2사단을 진천 방면에 투입하였다. 북한군 제2사단은 청주를 점령한 후 옥천으로 진격하여 대전 남쪽의 경부선 도로에 진출하여 대전 방면에서 후퇴하는 국군 및 미군의 퇴로를 차단할 계획이었다. 음성에서는 백선엽 사단장이 지휘하는 제1사단이 박성철이 지휘하는 북한군 제2군단 제15사단을 막았지만 방어선이 다시 남하하면서 괴산을 내주고 청주시 미원면 방향으로 철수하였다. 같은 시기에 조치원에서는 미군 제21연대가 북한군 제3사단, 제4사단, 제105전차사단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7월 7일 진천 지역이 북한군에 점령된 데 이어 7월 8일에는 천안이 점령되고, 4일 후인 7월 12일에는 조치원까지 점령당하고 말았다. 진천을 차지한 북한군은 곧바로 청주를 향하여 내려와 미호천이 전장이 되었다. 청주 시내에서 7㎞ 거리에 있는 미호천은 방어에 적합한 지형이었다. 동서로 흐르는 미호천 양쪽으로 넓은 논이 펼쳐져 있고, 청주 쪽에는 야산이 길게 늘어서 있다. 야산은 오창 일대와 진천에서 청주로 오는 도로와 팔결다리를 막는 요지였다. 그러나 북한군의 위력은 전선을 정리할 시간의 여유를 주지 않은 채 계속되었으므로 수도사단은 미호천을 도하하여 주중리[현 주중동]-발산리까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호천을 건넌 아군은 즉시 미호천 교량을 폭파하여 적의 추격을 일단 정지시켜 아군의 진천-청주 간 도로변의 방어 진지를 구축하였다. 국군 제1사단은 미호천 남방에 진지를 구축하고 이 선에서 북한군의 도하를 적극 저지하는 청주 방어 태세를 정비하였다.
[미호천 전투와 후퇴]
국군 수도사단은 미호천 남쪽에 3개 연대를 배치하여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제18연대는 우익을 맡아 현 청주공항 인근의 신안리와 외하리[현 외하동]에 자리를 잡았고, 제1연대는 사단 중앙의 585번 도로[현 팔결로]와 정상리 사이, 즉 오근장 부근에 저항선을 폈다. 제8연대는 무심천 서쪽 지금의 강서동 야산에 배치되었다. 제1연대의 연대장은 제7연대 창설 때 부임한 이희권 중령이었다. 포병중대는 이보다 남쪽인 율량동으로 이동하여 사격 지원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전황은 매우 불리하게 돌아가 국군 각 사단은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에게 밀려 황급히 후퇴하였다. 청주에는 제1군단사령부를 비롯하여 각 연대 지휘소와 보급부대가 내려와 있었는데, 뿔뿔이 남하하던 각 사단의 낙오병을 재편성한 부대도 청주 방어에 가세시켰다. 청주에서 북한군 진격을 지연시킨 뒤 보은을 거쳐 소백산맥 일대로 내려가서 방어진을 구축하는 것이 목표였다.
7월 11일 오전 8시, 청주-진천 간 585번 도로를 따라 남진한 북한군은 청주 북방 10㎞에 있는 오창에 와서 미호천 도하를 준비하였다.
7월 12일 오전, 북한군 제2사단 정찰대는 도하 지점을 물색하였고, 오후에는 1개 연대를 오창면 화산리에 집결시켰다. 북한군 집결 사실을 알게 된 수도사단장 김석원 준장은 포격 지원을 요청하였고, 군단 포병은 포 11문으로 집중 포격을 실시하였다. 또한 북한군의 청주 진입을 저지하기 위하여 미호천의 유일한 교량인 팔결다리를 폭파하고, 오후 2시에는 항공 지원을 요청하였다. 약 30분 후 F-51전투기 2개 편대가 나타나 기총사격과 네이팜탄 공격을 가하였고, 105㎜ M-2포로 일제 기습 사격을 함으로써 북한군 제2사단은 순식간에 800명의 병력을 상실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많은 사상자를 내고도 북한군 제2사단 주력 부대는 일체의 휴식도 없이 독전을 강행하여 드디어 13일 새벽 화산리, 오근장 부근에서 미호천을 도하하였다.
7월 13일, 미호천 남쪽 야산 진지에 있던 제18연대와 제1연대는 포병과 함께 사격을 가하여 북한군을 저지하였지만, 13일 새벽 재개된 도하 공격을 받고 일진일퇴의 격전을 반복하였다. 사단장이 진두에 나서 지휘하였지만 5시간 동안의 격전 후 병력의 열세로 인하여 사단 주저항선은 무너졌다. 한편 조치원에서 미군을 격파한 북한군 제3사단의 일부가 국군 제1군단의 좌익에 공격을 가하여 옴으로써 청주가 위협을 받게 되었다. 김홍일 군단장은 시가전을 계획하기도 하였지만 당시 전황으로는 청주 시가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군단사령부를 보은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리고 청주역 앞에 산적하여 있는 상당한 양의 양곡을 후퇴 직전까지 후송하고 나머지 일부는 불태워 버렸다. 한편, 12일 청주를 거쳐 철수한 국군 제17연대는 2일간에 걸쳐 보은중학교에 집결하여 부대를 정비하였다. 15일에 수도사단장은 제17연대를 남일면으로 이동하게 하여 남일면 지역으로 진출하는 적을 저지하라고 명령하였다.
[북한군의 청주 점령]
청주에서의 전투 상황을 파악한 군단장 김홍일 소장은 수도사단장에게 청주의 남쪽에 있는 국사봉-고은리-성무봉[431고지]에 저지선을 치도록 명령하였다. 군단지휘소에서 수도사단장 김석원 준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김백일 대령 등과 청주 방어 여부를 놓고 작전회의를 열었다. 일부 지휘관은 시가전을 주장하기도 하였지만 훈련이 안 된 병력으로 시가전은 무리라고 결론을 내리고 미원-마동리-문의 선으로 철수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수도사단은 청주 시내를 버리고 남쪽으로 물러나 7월 14일 오전 남일면에서 진지를 구축하였다. 7월 13일 5시경 청주로 접근한 북한군은 포병을 중앙에 배치한 후 시가지를 향하여 포격을 하였다. 그리고 북한군 제1군단의 좌익부대인 제2사단이 서북쪽과 서쪽으로 들어와 자정 무렵 청주를 점령하였다.
[고은리 일대에서의 치열한 공방전]
중부 전선까지 내려온 북한군은 경부 축선의 좌측으로 남진하여 전선을 둘로 나눈 후 대전을 동부에서 압박할 계획이었으나 수도사단의 저항에 막혀서 실패하였다. 한편 수도사단은 청주에서 부대를 재편하고 방어 전투를 벌이면서 자신감을 어느 정도 회복하였다. 신형 무기의 확보, 항공 지원 등이 사기를 높였다. 이때 지금의 공군사관학교 뒤 성무봉에 배치된 제18연대가 중앙의 제1연대와 간격을 좁히고 도로 통제를 210고지인 태봉으로 진지를 옮겨 실시하였다. 제8연대는 서쪽의 국사봉 일대에 배치하였고, 제1연대는 282고지와 가산리 사이에 배치하였다. 제18연대는 동쪽의 태봉에서 은행리 뒷산 사이에 각각 배치하였다. 사단지휘소는 은행리에 위치하였다. 이때 청원군에는 수도사단과 함께 제1사단과 제2사단이 각각 미원면과 남이면 봉무산 일대에서 방어선을 펴고 있었다.
7월 14일 아침, 북한군 제2사단은 정찰을 실시한 후 오후에 고은리와 부강리 쪽으로 병력을 남하시켰다. 청주에서 고은삼거리 쪽으로 향한 북한군은 오후 2시경 4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남일공립국민학교[현 남일초등학교] 전방 1㎞ 효촌리까지 접근하였다. 수도사단은 10㎜ 야포를 발사하여 기선을 제압하였고, 제1연대와 제8연대도 박격포 포격을 가하였다. 남일공립국민학교 동쪽의 제1연대 진지에서도 기관총과 소총 사격을 집중하였다. 북한군은 전차포와 야포로 대응 사격을 한 후 동쪽 성무봉 앞산으로 공격 방향을 바꾸었다. 14일 밤 북한군이 남일공립국민학교를 점거하면서 국군 제1연대와의 대치 거리는 500m가 되었다.
한편, 14일 오후 3시경 청주에서 부강으로 행군하던 북한군 제2사단은 남이면 수대리 일대까지 진출하였다. 국사봉의 북쪽 수대리 일대에 배치되었던 제8연대 제2대대가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대대장 정승화 대위는 수류탄전을 전개하면서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을 가까스로 격퇴하였다.
7월 15일, 북한군 제2사단은 14일 전날에 이어 제1연대와 제8연대 정면에 포격을 집중하였다. 북한군 2개 대대 병력이 고은리 방면으로, 1개 대대 병력은 수대리와 척산리에서 부강리 쪽으로 남하하였다. 수도사단은 집중 포격으로 북한군을 일단 저지하였지만, 오전 10시경 전열을 재정비한 북한군의 공격으로 인하여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전투가 치열하여지자 김석원 사단장은 북한군의 허를 찌르는 공격을 계획하였다. 보은에서 제17연대 제2대대를 불러서 사단 예비대인 제17연대 제3대대와 함께 장암리와 효촌리 방면으로 공격하는 작전이었다. 오전 8시경 제2대대가 도착하자 사단장은 제17연대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제17연대장 김희준 중령이 제2대대장 송호림 소령과 제3대대장 오익경 소령에게 명령을 내리면서 반격이 시작되었다. 7월 15일 오후 1시에 제1연대와 제8연대는 효촌리와 장암리로 북한군을 격퇴시켰다. 하지만 남일공립국민학교 앞 하천 부근에서 북한군 전차 2대가 포격을 가하고, 고지에 배치된 북한군이 사격하여 오자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였다. 장암리를 목표로 정한 제17연대 제3대대는 국사봉 동쪽 능선에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자 북한군은 용평 방향으로 철수하였다가 전차를 앞세워 공격하여 왔다. 이때 F-15전투기 2개 편대가 작전 지역 상공에 나타나 북한군 제3대대 진지까지 공격을 가하여 대대 보급소를 파괴시켰다.
그동안 거침없이 남하하던 북한군은 청주에서 제17연대의 반격 작전에 막히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군 제2사단은 대전으로 공격할 계획이었지만 미호천과 고은리 일대에서 두 번이나 수도사단에게 저지를 당하자 청주를 떠날 수 없었다. 북한군 사령부는 제2사단장 최현 소장에게 제2사단장의 결정적이지 못한 행동 및 보병과 포병 간 협조 체제의 미비로 인하여 7월 11일부터 12일까지 진격이 지연되었다고 책임을 추궁하였다. 이로 인하여 북한군의 공격이 치열하여졌다. 제2사단은 수대리·고은리·성무봉 등 3개 방면으로 동시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7월 16일 오전 10시경, 대대 규모의 북한군이 지금의 청주 동남지구인 백운동을 경유하여 효촌리 동북쪽 3㎞인 관봉을 오른 다음 능선을 따라 성무봉을 공격하였다. 또 전차대를 선두로 1개 대대가 고은리로 공격하여 왔고, 장암리에서 국사봉 쪽으로도 공격하여 왔다. 성무봉 공격은 제18연대 제1대대에 막혀 실패하였지만, 고은리 전투는 치열한 공방전으로 이어졌다. 북한군은 전차 6대로 남일공립국민학교까지 접근하여 포격을 가하였으며, 수도사단은 인근에 배치한 57㎜ 대전차포 4문을 동원하여 저지하였다. 오후 1시경 사단의 요청으로 출격한 F-15전투기 편대가 기관총 사격과 네이팜탄 공격을 가하였다. 북한군 전차 1대가 파괴되자 나머지 5대는 북쪽으로 도주하였다.
오후 4시에 북한군은 전열을 정비하여 공격을 재개하였다. 보병부대를 정면에 투입하고 전차를 고은삼거리 동쪽으로 우회시켜 배후를 공격하였다. 이 공격으로 혼란에 빠진 국군은 지휘 체계가 무너지고 많은 사상자가 나오자 철수하였다. 제1군단은 항공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제1연대와 제17연대 병력을 노동리와 분터골고개, 그리고 시루봉 선에 배치하였다. 국사봉의 제8연대도 고전하였다. 장암리와 가산리 방향으로 오는 북한군에게 밀리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새로 배속된 제17연대 제10중대가 야간 공격을 하여 중대 규모의 북한군을 섬멸하고, 기관총 9정과 소총 67정을 노획한 것이 큰 성과였다.
[청원 전투 이후의 상황]
수도사단은 7월 11일부터 13일까지의 미호천 전투와 14일부터 16일까지의 고은리 전투를 끝내고 17일 오후 제8연대가 보은에 집결함으로써 군단의 전선 조정에 따른 철수를 완료하였다. 미호천과 고은리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한 것은 큰 성과였다. 충남 대전·공주 등 서부 지역과 동부의 강원도 일대에서 북한군이 속도를 높여서 남진한 것과 비교된다. 이렇게 볼 때 청원 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확보하여 준 전투였다. 청원군 오창면과 남일면을 비롯한 인근 주민들은 갑자기 전투가 벌어지자 격렬한 총소리와 대포 소리에 놀라 황급히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야 하였다. 인근의 주민들은 당시의 짧았지만 힘들었던 피난 생활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북한군은 약 2개월 동안 청주를 점령하였다. 낙동강 전선을 돌파한 미군 제1기병사단이 상주와 보은을 거쳐 청주로 들어온 날은 9월 26일이었다. 이때 북한군은 패산하여 전투조차 없었다. 미군 전차 부대는 인천에 상륙한 미군과 연결하기 위하여 오후 5시 청주를 떠나 진천으로 북상하였다.
북한군 패잔병을 제압하는 작전은 국군 제1사단과 제11사단이 맡았다. 제11사단 제11연대는 9월 28일 미원을 거쳐 청천으로 올라가며 북한군 퇴로를 차단하였으며, 제15연대는 문의 일대로 진격하여 왔다. 이 진격 작전에 이어 제1사단 사령부가 10월 2일 청주로 들어왔다. 그리고 10월 3일과 4일에 제11연대가 증평 일대에서, 제15연대가 미원 일대에서 잔적 소탕 작전을 전개하였다. 국군 제1사단의 11연대, 12연대, 15연대는 10월 5일 부대를 정비하고 북상을 준비하였다. 제1사단 정훈부와 군악대가 청주시장에서 군경과 시민 위안 연주회와 시가행진을 벌인 뒤 10월 7일 사단사령부가 안성으로 이동함으로써 청원 전투는 막을 내리고 한국전쟁사의 중요한 전투로 기록되었다.
[백골부대의 탄생]
한편, 청원 전투가 끝난 후 보은에서는 국군 제8연대와 제7사단 제3연대의 잔여 병력이 제18연대에 각각 편입되었다. 주로 3개 연대의 상사, 중사 등 고참병들로 편성된 제18연대는 이후 전투력이 강한 부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제18연대가 소속된 수도사단은 본래 ‘사자부대’라 칭하였는데, 북한에서 월남한 서북청년회 출신 청년들이 자진 입대하여 주축을 이룬 제18연대 병사들이 ‘죽어서 백골이 되더라도 공산당과 싸워 조국을 수호하겠다’는 의미로 철모에 백골을 그려 넣고 다녔으므로 제18연대를 ‘백골부대’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다 1950년 12월 제18연대가 흥남 철수 작전 때 수도기계화보병사단에서 3사단으로 배속되었고, 6·25전쟁이 끝나고 사단의 공식 명칭을 ‘백골부대’로 변경하였지만, 그 창립의 역사는 청원 전투에서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