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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3121
한자 先史
영어공식명칭 Pre-histor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범철

[정의]

충청북도 청주 지역의 구석기 시대부터 초기 철기 시대까지 역사.

[개설]

선사 시대는 인류가 등장하였으되 문자가 없었던 시기를 역사 시대와 대비하여 칭한다. 그러나 상징적 기호도 문자로 보기도 하여 단편적 존재 여부보다는 문해(文解)[literacy]를 전제하는 성문 체계 또는 스스로 남긴 역사 기록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더 일반적이다. 서기전 5000년보다 앞서 문자로 볼 만한 것들이 나타나지만, 수메르인들이 서기전 3500~3000년에 문자를 발명하였다고 보는 것도 그 이유이다. 실제 역사 서술에서의 선사·역사 시대 구분은 그보다도 훨씬 복잡하며, 나라마다도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는 대체로 삼국이 영역 국가가 되는 때부터를 시작으로 보지만, 고구려와 백제는 4세기, 신라는 6세기 등으로 구체적인 시기가 다르다. 중국의 경우, 상(商)이 성립하는 서기전 16세기부터를 역사 시대로 보고, 일본은 율령이 반포되는 7세기부터를 역사 시대로 본다. 또한 선사·역사 시대가 서로 맞닿아 있지 않다. 양 시대의 중간에 원사, 곧 스스로 남긴 기록은 없지만 주변국의 기록을 통하여 존재를 알 수 있는 단계가 널리 인정된다. 우리나라도 원사를 인정하되, 학문 분야간 다소 차이가 있다. 다만, 구석기·신석기·청동기 시대를 선사 시대로 정하고, 물질문화의 잔적과 환경 자료 등을 바탕으로 당시의 사회·문화상을 밝히는 점은 분명하다.

[선사 시대 청주의 사회와 문화]

청주시 일대에서 인류의 거주는 구석기 시대에 시작된다. 지질적인 특성과 연대 측정값으로 보아 후기 플라이스토세[129,000~11,700년 전]에 해당하며, 만수리, 율량동 등 유적은 당시의 상황을 보여 준다. 구석기 유적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는 강자갈을 직접떼기법으로 만든 크고 작은 석기가 수천·수백 점씩 출토되었다. 이외에도 다소 늦은 시기에 해당하는 20여 개 유적들이 미호강과 지류 주변의 저지대와 구릉에서 확인된다. 이런 환경을 선호한 듯하지만 오래 머무르기보다는 계절에 따라 이동하며 생활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두루봉 등 남쪽 산악 지대의 동굴은 추운 기후를 피하고 산짐승을 사냥하는 거점이었던 듯하다.

현재까지 청주시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 유적은 10개 소에도 미치지 못한다. 주로 미호강 수계 주변의 저지나 구릉에 있는데, 대체로 신석기 시대 늦은 시기에 속한다. 유적당 한두 기에 지나지 않지만 집자리가 발견되고 땅을 파는 석기가 출토되어, 정주(定住)를 기반으로 한 간단한 작물 재배가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다만, 수렵 도구나 식료 처리용 도구의 비중이 높아 농경이 본격화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선사 시대의 주거지]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 청주의 인구는 아주 소규모의 작은 집단이 흩어져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면서 사뭇 다른 양상이 전개된다. 미호강 수계 주변의 저지와 구릉 지대 곳곳에 크고 작은 마을이 들어선다. 현재까지 확인된 것만도 60여 소에 이르는데, 3분의 2 이상은 10가구 미만으로 이루어졌지만 60가구가 넘는 곳도 있다. 이들은 청동기 시대 전기[서기전 13~9세기]와 중기[서기전 9~4세기]에 속한다. 테크노폴리스, 오송, 용정동, 신평리 등 전기 마을 유적에서는 화덕, 기둥 구멍, 받침돌, 토기 꽂는 자리 등이 갖춰진 평면 장방형 주거가 발견된다. 테크노폴리스, 쌍청리, 봉명동, 장대리 등 중기 마을 유적에서는 중앙에 기둥 구멍이 있는 타원형 구덩이를 갖춘 원형 또는 방형의 주거가 주로 발견된다. 주거의 규모와 구조로 보건대, 전기에는 확대 가족이, 중기에는 핵가족이 보편적이었던 듯하다. 가족 단위의 가구들은 미호평야와 주변의 곡저 평야에서 뗀 돌도끼나 양날 도끼, 홈자귀, 끌, 반월·삼각형의 칼, 낫 등의 석제 도구를 활용하여 벌목과 개간, 농기구 제작, 수확 등 농경에 필요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한다. 인구의 증가, 정주 생활의 확대 및 저지대 경작의 본격화는 청주시 일대에서 농경 사회가 성립하였음을 시사한다. 한편, 고인돌, 돌널무덤 등 형태가 잘 갖춰진 무덤을 이용한 매장 행위도 본격화한다. 특히, 고인돌은 농경 사회 영역 표시물의 역할도 가졌던 바, 매장 관행 정착과 농경 사회 발달의 연결고리가 되는 듯하다. 현재까지 청주시 관내에서는 60기가 넘는 고인돌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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