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272 |
---|---|
한자 | 歷史 |
영어공식명칭 | histo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양기석,김영관 |
[정의]
충청북도 청주 지역의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선사 시대]
충청북도 청주 지역은 문의면 노현리 두루봉 동굴을 비롯하여 현도면 노산리, 오송읍 만수리, 옥산면 소로리, 흥덕구 봉명동, 청원구 율량동 등지에서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만든 각종 석기를 비롯한 생활 흔적이 발견되었다. 석기를 만들던 자리가 드러나고 백두산에서 산출되는 흑요석이 출토되는 등 아주 먼 지역과 교류한 흔적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옥산면 소로리의 토탄층에서는 1만 5000년 전의 고대 벼가 출토되어 벼의 기원과 진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오송읍 쌍청리, 옥산면 가락리, 북이면 영하리, 흥덕구 봉명동, 청원구 사천동과 율량동 등 미호강과 지류인 무심천, 석화천 주변의 낮은 구릉의 정상부와 사면부에서는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집자리를 비롯한 생활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신석기 사람들은 작은 규모의 취락을 이루어 살았으며 물고기 잡이와 수렵, 채집, 농경 활동 등을 하면서 생업을 이어 갔다.
청동기 시대에 해당하는 유적은 거의 청주 지역 전체에서 확인된다. 유적은 주로 하천변의 충적지나 구릉, 낮은 산지에 분포한다. 집자리는 오송읍 궁평리와 쌍청리, 오창읍 장대리, 흥덕구 정봉동과 내곡동·향정동·봉명동·송절동, 강내면 황탄리와 태성리, 북이면 대율리, 내수읍 학평리 등에서 발견되었다. 농경에 유리한 조건을 갖춘 곳이면 취락을 형성하고 오랫동안 거주하였다. 고인돌과 돌널무덤, 돌덧널무덤, 움무덤, 독무덤 등 다양한 종류의 무덤이 만들어졌고, 토기를 굽던 가마도 발견되었다.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무덤 양식인 고인돌은 오송읍 상정리, 상당구 운동동, 문의면 가호리 등에서 조사되었다.
[고대]
청주 지역은 삼한 중 마한의 한 소국이 있었던 곳이다. 만주와 한반도 북부로부터 철기 문화가 유입되면서 청주 지역에도 철기 문화가 유입되었고,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철기 문화를 수용한 토착적인 정치 세력이 대두하였다. 청주 지역에서 마한과 관련한 유적은 흥덕구 오송읍 봉산리와 연제리, 송절동과 문암동, 화계동 등의 대규모 토광묘와 주거지, 공방 유구 등이 있다. 그리고 오창읍 송대리와 상평리, 서원구 산남동 고분 등이 있다. 오송읍과 송절동의 대규모 토광묘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들은 청주가 마한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는 증거이다.
한강 유역에서 건국한 백제가 목지국 등 마한 세력을 병합하고 청주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3세기 후반부터이다. 4세기 중엽 이후 청주 지역은 백제의 영역에 완전히 통합되었다. 이를 입증하는 유적이 4세기 중엽에서 6세기 중엽까지 조성된 신봉동 고분군이다. 백제는 상당현을 설치하여 청주 지역을 다스렸다.
백제에 이어서 청주 지역에 진출한 나라는 신라였다. 5세기 말과 6세기 전반에 청주의 동쪽과 북쪽에 고구려군이 일시적으로 진출하였지만, 고구려의 영역이 되지는 않았다. 신라가 청주 지역에 진출한 것은 474년 청주 남부의 문의에 일모산성을 축조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청주 남부 지역의 일부만 차지하였다. 청주 지역을 모두 차지한 것은 649년 도살성 전투 이후였다.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는 685년 청주에 서원소경을 설치하고 689년 서원경성을 축조하여 지방 지배 거점으로 삼았다. 757년 서원경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신라 후기에 서원부로 이름을 바꾸었다. 상당산성과 봉명동, 명암동, 용담동, 금천동 등지에서 발굴된 무덤과 운천동 신라사적비, 일본 나라의 정창원에서 발견된 「신라촌락문서」를 통하여 서원경 사람들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고려 시대]
후삼국 시대에 들어와서 청주는 궁예 세력의 요람이었다. 청주 호족들은 처음에 궁예의 세력 기반이 되었지만, 고려에 흡수되었다. 고려에 들어와서 청주 지역은 여러 차례 행정 구역의 개편을 하였다. 940년 서원부를 청주로 고쳤고, 983년 전국의 주요 거점 지역에 설치한 12목 중 하나인 청주목이 된다. 995년 12목이 폐지되고 10개 도로 나누어 12주를 설치하자 청주는 중원도에 속한 전절군(全節軍) 절도사가 파견되어 다스리는 지역이 되었다. 1012년(현종 3) 절도사를 폐지하여 안무사(按撫使)를 두었다가 1018년 전국에 8목을 다시 설치할 때 청주는 그중 하나가 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청주 출신 경대승(慶大升)이 정중부를 제거하고 한때 권력을 장악한 일이 있었다.
[조선 시대]
조선 건국 초 청주 지역은 이성계에게 우호적이었던 경복흥(慶復興)과 개국 1등 공신이었던 정총(鄭摠), 정탁(鄭擢), 한상경(韓尙敬) 등을 배출하여 다른 지역에 비하여 우대를 받았다. 그리하여 1393년 11월 각도의 계수관(界首官)을 정할 때 청주는 양광도 계수관의 하나가 되었다. 1408년 감사가 목사를 겸하는 감사겸목제(監司兼牧制)를 시행하면서 청주는 도관찰사가 머무는 본영이 되어 충청도에서 으뜸가는 고을이 되었다. 이후 청주에는 충청감사가 목사를 겸하였고, 그렇지 않은 때에는 정3품의 목사를 두어 다스렸다. 1457년 세조는 감사겸목제를 폐지하고 지방의 행정 체계와 군사 체계를 하나로 묶어 치안과 국방을 일원화시킨 진관 체제로 바꾸었다. 이때 청주진은 진천, 문의, 회인, 보은, 청산, 황간, 영동, 옥천, 청안을 진(鎭)으로 삼아 통할하였고, 행정뿐만 아니라 군사 중심지로의 기능도 가지게 되었다
조선 시대 청주는 충청좌도를 관할하는 지방 행정의 중심이었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청주는 서울을 방어하는 군사상의 요충으로 주목되었는데, 해미에서 병영을, 옥천에서 진을 옮겨와 청주의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이때부터 청주읍성에는 목사 혹은 병사가 지휘하는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을 두고, 상당산성에는 병마우후, 율봉역에는 찰방을 두어 역할을 분담하였다. 조선 후기 청주는 지리적 위치가 서울과 가까워 많은 양반 사대부들이 모여 사는 곳이 되면서 ‘양반의 고장’이라고 불리었다. 그렇지만 노비가 주인을 범하거나 또는 반란이 일어나는 등 정치와 사회적인 문제로 인하여 7차례나 읍호가 강등되었다가 복구되었다.
[근대]
청주는 근대에 이르러 몇 차례 행정 구역의 변동이 있었다. 1895년 6월 전국의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를 두고 부·목·군·현 등 지방 행정 단위를 모두 군으로 통일하자 청주목은 공주부 관할의 청주군이 되었다. 그러나 1년 2개월 만인 1896년 8월 23부제를 폐지하고 13도제를 시행하면서 청주는 충청북도 청주군이 되었다. 당시 충청북도 관찰부는 청주가 아닌 충주에 두었다. 1908년 6월 충주에 있던 관찰부가 청주로 옮겨 왔다. 청주는 충청북도의 행정 중심 지역으로서의 위상을 되찾게 되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의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문의군을 합병하고, 수신면은 천안군, 서강외일하면 조치원은 연기군, 청천면은 괴산군에 넘겨주는 등 변동이 있었으나 관할 지역 면적과 인구는 늘었다.
[현대]
1946년 6월 청주읍을 청주부로 승격시켜 청주군에서 분리한 후 청주군 나머지를 청원군으로 개칭하였다. 1949년 8월 청주부는 청주시가 되어 청원군과 완전히 분리되었다. 이 때문에 오랜 역사적 전통과 생활권을 유지하였던 청주는 두 개의 행정 구역으로 나뉘었다. 2012년 7월 청원군 부강면이 세종특별자치시에 편입되었다. 2014년 7월 청원군과 청주시가 68년 만에 통합되어 새로운 통합 청주시가 출범하였다. 2023년 6월 현재 청주시는 상당구, 서원구, 청원구, 흥덕구의 4개 구에 39만 6675세대, 87만 2398명이 거주하고 있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
2015.01.27 | 오자 수정 | 조선 후기에는 청주지역이 서원을 중심으로 성리학 학통을 이어가는 중심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청주와 청원지역에 신항서원, 기암서원, 송계서원(松溪書院), 국계서원을 비롯하여 최대의 영향력을 가졌던 화양서원 등이 있어 다른 어느 곳보다 많은 서원들이 있었다. 이는 당시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김장생(金長生)으로 이어지는 호서사림 계보의 맥을 이은 송시열(宋詩烈)의 학문과 정치적 영향력을 받아 성세를 나타내게 된 것이다. -> 조선 후기에는 청주지역이 서원을 중심으로 성리학 학통을 이어가는 중심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청주와 청원지역에 신항서원, 기암서원, 송계서원(松溪書院), 국계서원을 비롯하여 최대의 영향력을 가졌던 화양서원 등이 있어 다른 어느 곳보다 많은 서원들이 있었다. 이는 당시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김장생(金長生)으로 이어지는 호서사림 계보의 맥을 이은 송시열(宋時烈)의 학문과 정치적 영향력을 받아 성세를 나타내게 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