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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1901
한자 社會
영어음역 sahoe
영어의미역 society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집필자 허석렬

[정의]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의 조직화된 집단.

[개설]

청주는 전통시대 이래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많은 역사적 유산과 전통문화를 보유하고 있는 도시이다. 광복이후 시로 승격된 청주는 충청북도의 도청소재지로서 지방행정의 중심지이고, 전자산업 등 첨단산업의 발달로 우리나라의 주요 공업중심지 중 하나로 성장하고 있다. 또한 청주는 전통적으로 교육도시로 불릴 만큼 교육인구의 비중이 높다.

1980년대 이래 청주는 급격한 인구성장세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청주지역의 산업적 성장과 인근 농촌지역으로부터의 인구유입에 의한 것이다. 급속한 인구성장과 함께 고층 아파트로 이루어진 근린지역이 급속히 개발되면서 도시의 외관과 주민들의 생활양식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청주지역 사회의 또 하나의 특징은 시민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환경, 여성, 행정 감시, 인권 등의 시민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이들 시민운동 단체들은 주요 시민사회 쟁점들에서 강한 연대의 틀을 유지하고 있다.

[전통시대의 청주]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청주는 이미 마한시대 때부터 대규모 취락이 존재하였고, 지역사회의 계급적 분화도 상당히 진전되어 있었다.

삼국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청주는 통일신라시대 때부터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689(신문왕 9)년 서원경성이 축조되었고, 757(경덕왕 16)년에 신라 5경 중 하나인 서원경으로 승급되어 교통과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고려 때에는 청주목이 되었고, 목의 지위는 조선시대 때까지 유지되었다.

융희(대한제국의 마지막 연호) 2년인 1908년 관찰부가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하게 되면서 청주는 충북의 수위도시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조선 말기의 청주읍성은 신라 신문왕 때 축조된 성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청주성 내에는 관아건물과 민가들이 조밀하게 밀집되어 있었고 성외에는 동서문 이남에 민가가 밀집해 있었고, 성곽 동쪽 우암산록에도 민가들이 산재해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청주]

1908년 청주는 도청소재지가 되고 이름도 청주목에서 청주면으로 개칭하여 근대적 도시화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 진행된 청주의 도시화는 겉으로 보기에는 근대적이었으나 사실은 식민지적 도시화의 성격을 띨 수 밖에 없었다.

식민지적 도시화의 가장 강력한 결과는 전통적 공간구조의 철저한 파괴이다. 청주읍성의 구조는 보존되지 않고 철저히 파괴되었는데, 읍성의 파괴는 청주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지역에서 행해졌다.

일제는 1910년 10월 청주면내 시구개정(市區改訂)을 기안하여 1911년 10월에 공사를 시작, 1915년경에 완료하였는데 이 사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기존 성벽을 허물고, 그 돌로 하수구를 설치하였고 남석교로부터 북문으로 통하는 일직선의 간선도로를 확장, 개수 하였는데 이 중 일부가 지금의 성안길이 되었다. 이 도로를 기준으로 가로, 세로로 바둑판 모양의 시가지가 조성되었다. 우리나라의 다른 도시와는 달리 구 성내의 도로가 그대로 이용되어 성내의 가로 골격의 체계는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1920년대 청주시내에는 도청, 청주군청, 경찰서, 법원 지청, 헌병대 본부, 감옥 등의 식민지 통치 행정기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외에도 각종 금융기관, 공립소학교, 농업학교, 보통학교 등의 교육기관 등이 위치하여 식민지 지방행정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이 강화되었다.

도시산업의 발달은 미미하여 공업시설로는 몇몇의 정미소, 인쇄소, 사천동의 원잠종 제조소 등을 제외하고는 공장다운 공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일제는 1922년 대청주계획이라는 것을 입안하였는데 흥미있는 것은 제3단계 계획중 일환으로 아동공원, 공원도로, 대신궁(大神宮) 등의 건립계획이 들어 있는데 이는 청주지역에서 계속 증가하고 있던 일본 거류민들의 생활을 고려하고 식민지배의 상징성을 강화하기 위한 구상을 식민지 당국이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때의 청주지역 사회는 일본인의 유입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우선 식민지 통치기관은 말단을 제외하고는 거의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청주시내로의 일본인 이주는 이와 같이 식민지 행정기관만이 아니라, 운수, 금융, 상업, 건설업, 농업 등에서 활발하게 일어났는데, 이들은 지배계급인 동시에 지배민족으로서 청주 지역 사회에 군림하였다.

지역사회 내의 이러한 민족적 모순은 식민지 해방운동을 촉발시켰다. 청주군 내 여러 지역에서 3·1운동 기간 동안 많은 만세 시위 사건이 일어났다. 청주지역 3·1 운동의 특징은 기독교나 유림 쪽 인사들보다 천도교계 인물들이 시위운동을 이끈 사례가 많았고 시위방법으로서 횃불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1920~1930년대 청주는 인구가 일정하게 증가하고, 소규모이긴 하지만 제조업체도 늘어나는 등 식민지 공업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다. 당시에는 절대적으로 농업종사자가 많았고, 공업 종사자 중에서는 방직공업과 요업, 토석가공업 종사자가 그 다음을 차지하고 있었다. 해방 후 청주에서 도자기 공업과 방직업이 비교적 활발하게 행해졌는데, 그 단초를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실업자의 수효가 농업종사자를 훨씬 넘어선다는 사실에서 그 당시 식민지 민중의 피폐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농촌의 피폐화는 청주군의 농민층 구성에서도 나타난다. 1930년대 초 청주군 농민층 중 지주의 비율은 1%, 자작농은 13%에 불과하고 자소작이 22.7%, 소작이 63.3%에 달하고 있다. 청주군 내의 토지는 거의 부재지주 소유로 자작농의 경우도 점차 소작농으로 전락해가는 추세가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농촌생활의 피폐는 1930년대 소작쟁의가 폭증하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 행정기관이 밀집해 있던 청주면은 1930년 조선총독부의 읍면에 관한 규정령에 의하여 1931년 읍으로 승격한다. 이어 1934년 조선시가지 계획령이 발표된 이후 철도 교통의 요충지로서 청주는 본격적인 도시계획의 시대에 접어든다.

일제는 1939년 청주시가지계획을 발표하였으나 곧바로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그 계획은 빛을 보지 못하고 해방과 함께 청주는 다른 역사적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광복 이후 청주사회의 발전]

미군정 하에서 청주읍청주부로 승격되었고 청주군은 청원군으로 개칭되면서 청주부와 청원군은 분리된 독립행정구역이 되었다.

1950년 발발한 한국동란으로 도시기반 시설이 많이 파괴되었고 이로 인한 빈곤은 청주지역사회의 발전을 저해하였다.

청주시는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접 청원군 지역을 일부 합병하고 1968년 청주종합개발계획을 수립하여 본격적인 근대적 도시계획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1968년 계획의 목표는 도심에 편중된 인구를 외곽에 분산하여 도시의 균형적 발전을 이루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급격한 도시공간구조의 변화를 초래할만한 개발정책이 1960년대까지는 거의 시행되지 않았다. 다만 1960년대 중반부터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서문시장이 팽창함으로써 도시 중심부의 북서부가 급격히 성장하고, 일제강점기시대부터 소매업자들에 의해 점유되어왔던 성안길 노변도 거의 포화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남문로와 북문로를 중심으로 무심천(無心川) 동측의 좁은 지역에 인구와 경제활동, 행정기능이 집중되어 신시가지의 형성이 요구되었다. 이에 부응하여 구도심의 외곽지대인 우암동, 내덕동 부근과 청주교 서쪽의 사직동 부근이 새로운 시가지로 형성되어 갔다.

1960년대에 몇 차례 도시구획 정리사업이 시행되어 도심과 가까운 몇몇 구역이 주택지로 정비되었다. 이와 함께 1967년부터 무심천(無心川) 제방도로 축조공사가 행해졌고 1969년에서 1970년에 걸쳐 서부공단 조성사업이 진행되었는데, 그 결과 송정동, 복대동 일대는 충청지역의 대표적인 공업단지로 변모하였다. 공단에 지역 토착산업체와 국내 대기업 계열의 공장이 입주함에 따라 청주는 공업도시로의 면모를 강화하게 되었다.

1971년 청주를 경유하는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됨으로써 청주는 수도권과의 분업관계를 강화하는 동시에 경부고속도로에 연결되는 진입로에 이어져 있는 간선도로를 중심으로 도시개발이 진행되었다.

1970년대에 시행된 몇 차례 토지구획 정리사업으로 기존 시가지의 여러 외곽지대에 새로운 주택지와 상업지구의 발전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1980년대 이후에는 새롭게 확장된 도시권역에 대규모 주택단지를 건설하고 공업단지도 기존의 공단지역 외곽을 광범위하게 확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시가지의 확장은 한편으로는 청주 인근지역에서 청주로의 인구 유입에 의한 도시인구 증가와 도시인구의 공업화에 상응하는 현상인 동시에 청주로의 인구유입을 더욱 촉진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청주시의 도시계획구역이 늘어남에 따라 청주를 원환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청원군과의 통합이 청주와 청원의 발전을 위한 과제로 제시되고 있다.

[현황]

청주지역의 지역권력은 지역사회의 다양한 자원에 대한 통제와 지역 내의 주요한 의사결정을 이끌어내는 힘을 말한다. 지역사회에서 이러한 권력의 원천은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행정적 지위, 기업체나 자산의 소유, 경영에서부터 오는 경제적 권력, 사회여론을 움직일 수 있는 언론 권력 등을 들 수 있고 권력의 개념을 확장한다면,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 같이 기존 권력에 대한 대항적 권력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지방 자치제 실시 이전에 청주지역 사회의 권력은 주로 중앙 정치나 행정에 참여한 인사들이 1차적인 원천을 제공하였고, 토착세력은 중앙권력이 지역사회를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동원하였지만 부차적인 권력을 형성하는데 그쳤다.

1990년대 중반까지 청주지역의 권력자들은 주로 정계와 관계에 주로 분포되어 있고, 지방정치보다는 중앙정치에 관여하는 사람이 많다. 또 한가지 특징적인 사실은 금융부문을 포함하여 기업계 종사자가 드물며, 교육, 언론 종사자도 드물고, 노동계 인사는 한 사람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청주의 지역 권력자들은 지연과 학연, 친목관계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전통적으로 청주고등학교청주상업고등학교라는 양대 학맥이 엘리트의 연결망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지방자치제는 토착 엘리트 세력이 새롭게 제공된 지방정치과정에서 새로운 권력자원을 획득하게 하는 원천이 되었다. 지역 출신 국회의원이 아직도 지역권력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지만 지방의회 의원 등이 새로운 지역권력을 획득하고 있다.

지방자치제 이후 청주 지역사회 권력구조에서의 또 하나의 변화는 기존의 대항 엘리트들이 지역정치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980년대 학생운동과 재야운동 경험자들이 집권당 등 정당의 당료로 충원되고 있고 이들은 총선이나 지방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직업구조는 2003년 청주시 인구 중 전문 관리직은 7~8% 내외를 차지하고 있고 소수 종사자의 비율은 12% 내외로 2002년보다 2배 이상 증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서비스업 종사자는 12%, 판매종사자는 13%, 농림, 어업, 숙련 종사자는 14.5%로 2002년 19.2%에 비해 급격하게 줄고 있다. 기능원 및 관련 기능 종사자의 비율은 9.1%로 전년보다 증대하고 있고 장치, 기계조작 및 조립 종사자는 12.1%로 전년보다 줄어드는 반면, 단순노무종사자의 비율은 12.1%로 전년보다 2% 증가하고 있다.

이런 추세로 볼 때 숙련직 일자리가 줄어들고 비숙련직의 일자리가 늘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농업인구가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청주시민의 주거형태는 단독 주택 거주의 비율이 급격히 줄어들고 아파트 생활로 급속히 이동하고 있다. 용암지구, 가경지구 등 새로운 아파트 주거지역이 팽창함으로써 도시의 경관이 급속하게 변화되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정** 청주인구 전 잘 몰랐어요.이 글을 보고 알았어요.청주인구 사랑해요. 2011.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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