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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1018
한자 厲祭
이칭/별칭 여신제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덕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영진김해인

[정의]

충청북도 청주 지역에서 제사를 지내 줄 자손이 없거나 억울하게 죽은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

[개설]

제사를 지내 줄 자손이 없거나 억울하게 죽은 귀신을 ‘여귀(厲鬼)’라 하고, 여귀에 대한 제사를 ‘여제(厲祭)’ 또는 ‘여신제(厲神祭)’라 한다. 여제에 대한 기록은 『예기(禮記)』에도 있어 주나라 때부터 있었던 제사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중국 역대 왕조에서는 약간의 형태적 변화가 있지만 여제는 계속 중시되며 이어져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태종(太宗)[재위 1400~1418년] 때 여제에 관한 기록이 처음 확인된다. 태종은 조선에서 여제를 지내지 않는 것을 지적하고 예조(禮曹)에 명을 내려 앞으로 여제에 관한 제법(祭法)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에 따라 이후 조정에서 지내는 국가 제사는 물론이고 각 군·현 단위의 고을까지 여단(厲壇)을 만들어 여제를 지내게 되었다. 여제가 생겨나면서 전쟁터에서 비명횡사한 사람들을 위하여 지내는 불교식의 수륙제(水陸祭)[수륙재(水陸齋)]가 금지되고, 여제가 그러한 영혼들에 대한 제사까지 함께하는 성격을 띠게 되었다.

여제 의 목적은 제사를 받아먹지 못하는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 줌으로써 한을 풀어 주고, 여귀가 민간에 해악을 끼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역병이 돌면 조정과 지역 관아에서는 더욱 여제를 중시하여 정성을 들였다. 여제를 지내는 날짜는 봄에는 청명(淸明), 가을에는 7월 15일, 겨울에는 10월 1일이다. 제사 장소는 각 성의 북쪽에 따로 여단을 마련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제관(祭官)은 서울이나 개성은 당상관(堂上官)을 파견하였고, 각 지방은 그 수령이 맡았다. 그러한 맥락에서 오늘날 충청북도 청주 지역에서는 조선 시대 청주목(淸州牧)문의현(文義縣)에서 여제를 지냈다.

[청주목과 문의현의 여제]

조선 후기의 읍지 모음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청주목의 여단은 “관아의 북쪽 5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오늘날 청원구 내덕동이다. 청주목여제 또한 『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에 따라 매년 청명일(淸明日), 7월 15일, 10월 1일에 정기적으로 세 번 관행제(官行祭)로 지냈다. 그러다가 1845년(헌종 11)부터는 청명과 10월 1일에 두 번만 제사를 지냈다.

제사의 절차는 먼저 청주목사가 성황사(城隍祠)에서 발고제(發告祭)를 지내고 나서 여단에 제물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냈다. 또 고을에 유행병이 크게 돌면 고을의 외로운 영혼들이 분노한 탓이라 하여 여신[여귀]을 달래는 제사를 지냈으며, 고을에 큰 전투가 있어 많은 사람이 죽으면 재앙을 예방하고자 미리 원혼들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냈다.

문의현에서는 여단은 『여지도서』에 따르면 “관아의 서쪽 양성산 남쪽 기슭에 있다”라고 하였고, 여제는 문의현령이 매년 봄 청명일, 가을의 7월 보름, 겨울의 10월 1일에 먼저 성황단에서 발고제를 지내고 나서 여단에서 희생으로 돼지 1마리를 잡아 정기적인 관행제로 지냈다고 한다.

[여제의 폐지와 여단의 훼손]

1896년 8월 고종(高宗)이 국가의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를 다시 조정하면서, 전국적으로 여제는 봄·가을, 즉 청명일과 10월 1일에만 제사하게 하였다. 이때 청주 지역의 여제 역시 똑같이 1년에 2회로 축소되었을 것이다. 관행제로 지내 오던 여제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폐지되었다. 여제를 지내는 여단 또한 일제 강점기 이후 점차 훼손되어, 청주목문의현의 여단 모두 오늘날에는 찾아볼 수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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