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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0809
한자 金基鎭
영어음역 Kim Gijin
이칭/별칭 팔봉,김팔봉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임기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별
김복진(金復鎭)[1901~1940][근대 조각가]
상훈 을지무공훈장|문화훈장
생년 1903년연표보기
몰년 1985년연표보기
본관 안동(安東)
팔봉|팔봉산인|여덟뫼|동초(東初)|구준의(具準儀)
출신지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팔봉리
아버지 김홍규
어머니 김현수
아내 강명희[함경도 출신]

[정의]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팔봉리 출신으로 초창기 한국근대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평론가 겸 소설가.

[개설]

한국 낭만주의 문학의 거점이라고 할 수 있는 『백조』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최초의 근대 연극단체라 할 수 있는 ‘토월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23년 『개벽』에 처음으로 프로 문학 이론을 소개하였다. 이후 ‘카프(KAPF)’ 발기인으로 프로 문학 운동에 참여하여 한국 문학사 특히 비평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클라르테운동의 세계화」를 비롯한 다양한 비평문과 더불어 「붉은 쥐」, 「젊은 이상주의자의 사」, 「청년 김옥균」, 「통일천하」, 「해조음」 등의 소설을 남겼다.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당시 함경도 성진 군수였던 김홍규와 어머니 김현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기진의 위로 누나가 둘, 2년 연상의 형인 김복진(金復鎭)[1901~1940]이 있었다. 특히 한국 근대조각의 아버지로 알려진 김복진은 타계 시까지 김기진의 예술적·사상적 동지였다. 토월회라든가 KAPF 조직에도 형 김복진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기진은 부인 강명희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다.

[생애]

1903년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팔봉리에서 태어났다. 김기진은 다섯 살 때부터 형 김복진과 함께 서당훈장으로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같은 해에 부친이 춘천군수로 자리를 옮김에 따라 서울 소격동으로 이사했다. 이때 서당선생도 함께 따라다녔다고 한다.

김기진 형제들은 아버지의 전근에 따라 자주 이사를 다녔다. 1916년 열네 살 때 아버지가 군수로 있던 영동의 영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와서 배재고보에 입학하였다. 이때부터 김기진은 자신과 더불어 초창기 한국 프로문학의 쌍두마차였던 박영희와의 친교를 시작하였다.

1919년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20년 일본 릿교대학 영문학부 예과를 거쳐 본과 1년을 중퇴하였다. 1923년부터 매일신보 등에서 약 17년간 기자활동을 하는 등 언론계에 종사하였고, 1938년 7월 3일 시국대응 전선사상 보국연맹의 결성위원으로 참가한 것을 계기로 친일노선으로 전향하였다.

1944년 중국 난징에서 열린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이광수와 함께 조선 대표로 참석했으며, 「문예시감」, 「국민문학의 출발」 등의 일제에 협력하는 여러 편의 글을 남겼다. 해방 직후 출판사 ‘애지사’를 운영하였다. 6·25전쟁 발발직후에는 공산군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는 등 수난을 겪었다.

1951년 대구로 피난, 종군작가로 입대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 49세였다. 이후 1953년 휴전까지 주로 전선문학에 해당하는 글을 남겼다.

1960년 4·19직전에는 민권옹호투쟁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자유당 독재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1960년에는 『경향신문』 주필을, 1961년에는 5·16군사 정부 하에서 재건국민운동중앙회 회장을 지냈으며, 1967년에는 소아마비아동특수보육협회장을, 1969년부터 1972년 사이에는 재건국민운동중앙회 고문, 세계복지연맹 한국본부 이사를 거쳐 1972년에는 한국 펜클럽과 한국문인협회의 고문을 각각 역임하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박정희 대통령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사회적 활동은 크게 줄었다. 1985년 향년 83세의 나이로 타계했으며,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마명리에 안장되었다.

[활동사항]

김기진은 일본 유학시절 형 김복진 등과 함께 신파극에 대항하는 본격적인 근대극 운동의 일환으로서 토월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일제강점기 한국 프로문학의 도입과 그 문학단체인 KAPF(1925~1935)의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대중화론’을 펴면서, 프로문학의 이념을 좇으면서도 미학(형식)과 대중성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무엇보다 의미 있는 것은 그가 비평가로서 자신의 문학이론을 일방적으로 주장한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이론에 걸맞은 작품을 남기려고 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념에 압도당해 미학에 소홀한 단편 「붉은 쥐」와 「젊은 이상주의자의 사」, 대중화에 급급한 나머지 사상성을 결여한 장편 「해조음」 등을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김기진은 일제강점기 말에 친일의 길로 접어들어 『매일신보(每日申報)』를 중심으로 한 친일문필활동의 오점을 남겼다.

그는 황도정신을 문예활동의 지표로 삼는다는 「문예시평」 외에도, 징병 및 학도병의 출진을 권유하는 시 「신세계의 첫 장」 등의 친일작품을 남겼다. 이러한 친일 전력으로 기진은 2002년 역사문제연구소가 발표한 42인의 친일문학인에 포함되었다.

해방이후에도 그는 한국 펜클럽과 한국문인협회의 고문역할을 하였고, 1세대 근대문학인으로서 문단과 관련된 다양한 회고의 글을 남겼다. 정치적으로는, 4·19직전에는 민권옹호투쟁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자유당 독재를 비판하였으며, 5.16군사혁명이후에는 재건국민운동 중앙회장을 역임하였다.

[의의와 평가]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이러한 사회·문화적 업적을 인정하여 을지무공훈장·문화훈장 등을 수여했다. 한편 그의 비평가로서의 선구적 업적과 그 유지를 계승하기 위해 1990년 한국일보사에서 '팔봉비평문학상'이 제정되었다. 제1회는 평론가 김현이 수상하였으며, 2005년 현재 16회를 맞고 있다.

[묘소]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마명리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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