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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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基昶 |
영어음역 | Kim Gichang |
이칭/별칭 | 운보(雲甫)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김기현 |
[정의]
한국화가.
[가계]
부인은 여류화가 박래현이다.
[생애]
1913년 2월 28일 서울에서 출생하여, 7세에 장티프스로 청각을 잃고, 부모의 도움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2001년 1월 23일 충청북도 청원군 내수읍 형동리 ‘운보의집’에서 향년 86세에 숙환으로 죽었다.
[학력]
승동보통학교를 졸업했다.
[활동사항]
이당화숙(以堂畵塾)에서 김은호(金殷鎬)에게 그림을 배워 6개월만에 「판상도무(板上跳舞)」, 「널뛰기」(1931)로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처음 입선한 뒤, 연 5회의 입선과 연 4회 특선을 기록했다.「수조(水鳥)」(제11회), 「여인」(제12회), 「정청」(제13회), 「엽귀」(제14회), 「해녀」(제15회)로 입선, 「고담(古談)」(제16회), 「하일(夏日)」(제17회), 「고완」(제18회), 「여일(麗日)」(제19회)로 특선하여 추천작가가 되었다.
1956년 국전 초대작가 심사위원, 수도여자사범대학교와 홍익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으며, 백양회(白陽會)의 중심인물로 활약하는 동시에 많은 해외전을 가졌다.
1만원 지폐에 세종(世宗) 얼굴을 그렸으며, 1993년 예술의전당 전시회 때 하루에 1만 명이 입장한 진기록도 세웠다.
청주에 정착한 운보(雲甫)는 청주지역의 정서를 온몸으로 받으며 쓰러지기 직전까지 한국미술의 정체성을 위해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했다.
[작품]
김기창의 작품은 대략 다섯 단계로 초기의 사실적 작품을 그린 구상미술 시기,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한국인의 모습으로 담은 신앙화 시기, 구상미술에서 추상으로 변하는 전환기의 복덕방 연작 시기, 청록 및 바보산수화 시기, 그리고 말년의 추상미술 시기로 나눈다.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다양한 조형 의지를 분방한 필력으로 구현, 한국 화단에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실험정신의 소유자다. 그의 예술은 크게 5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1931~1945년)는 정확한 관찰과 해석, 섬세한 묘사와 채색으로 전통적인 동양화와 일본화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제2기(1946~1950년)는 일본적인 영향에서 탈피하려는 움직임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제3기(1951~1960년)에는 새로운 동양화를 추구, 동양화의 사실적 평면 구성에서 대상을 단순화하며 입체적 구성을 시도하고 있다. 제4기(1961~1970년)에 이르러 운보는 완전 추상으로의 탈바꿈을 보인다. 5기(1971~2001)에 이르러 그는 한국적인 회화 정신을 찾는 새로운 작업을 펼쳐 이른 바 ‘바보산수’로의 귀결을 보여준다.
산수·인물·화조·영모(翎毛)·풍속 등에 능하며, 형태의 대담한 생략과 왜곡으로 추상과 구상의 모든 영역을 망라하고, 활달하고 힘찬 붓놀림, 호탕하고 동적인 화풍으로 한국화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가을」(1934), 「보리타작」(1956), 「새와 여인」(1963), 「소와 여인」(1965), 「태양을 먹은 새」(1968), 「나비의 꿈」(1968), 「군마도」(1970), 「웅(雄)」(1970), 「달밤」(1978), 「바보화조」(1976), 「청록산수」, 「바보산수」시리즈 등이 대표작이다.
[의의와 평가]
암울한 일제강점기시대를 젊은 시절 보내야했던 운보는 장애를 극복하고 그 만의 다양한 미술세계를 보여 미술적 학문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진보적 예술사상을 지닌 화가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