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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0001
한자 三一運動
영어공식명칭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of 1919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걸순한애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7일 - 청주 서문 우시장에서 장꾼들의 만세 시위 전개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10일 - 청주공립농업학교 만세 시위 계획 발각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21일 - 내수시장에서 천도교인 민원식 등 수백 명 만세 시위 전개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23일 - 강내면 태성리와 인근 지역 봉화 만세 시위 시작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30일 - 미원리 장터에서 대규모 만세 시위 전개
전개 시기/일시 1919년 4월 1일 - 청주군 내 8개면 봉화 만세 시위 전개
전개 시기/일시 1919년 4월 6일 - 문의면 산 위에서 횃불 시위 전개

[정의]

1919년 3월과 4월에 충청북도 청주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

[개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하게 된 데에는 「독립선언서」의 배포도 큰 역할을 하였는데, 호서 지방은 천도교인 인종익(印鍾益)이 처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안종익은 1919년 2월 28일 2,000매 정도의 「독립선언서」를 지참하고 서울을 떠나 3월 1일 전주에 도착한 뒤 약 1,700매의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고, 3월 2일에는 청주에 도착하였으나 일제 경찰에 체포되면서 청주 지역 「독립선언서」 배포는 실패하고 말았다.

[경과]

청주 지역 최초의 만세 시위는 청주공립농업학교에서 계획되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경성 중앙학교에 다니던 신영호(申榮浩)가 1919년 3월 9일 ‘경고아이천만동포(警告我二千萬同胞)’라는 제목의 격문을 가지고 고향인 청주로 돌아와 청주공립농업학교 기숙사에서 오석영(吳錫永) 등 학생들을 만나 경성의 상황을 전하고 만세 시위를 제안하였다. 기숙사에 모인 학생들은 청주에서도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경고문 300여 부와 태극기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3월 10일 학생들의 움직임을 수상하게 여긴 학교 측과 일제 경찰의 수색으로 계획이 발각되면서 시위는 좌절되었다.

청주에서 만세 함성이 처음 울려 퍼진 것은 1919년 3월 7일 청주 서문우시장에서였다. 의병장이었던 한봉수(韓鳳洙)가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서문장터 입구 마차 위에서 살포하고 장꾼들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3월 21일 천도교인 민원식(閔元植)의 지휘로 내수시장에서 수백 명의 천도교 교도들이 만세 시위를 벌였고, 4월 2일의 장날에도 다시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는데 이날 청주 시내에는 항일 독립을 염원하고 촉구하는 벽보가 수없이 붙어 있었다.

청주 지역 만세 시위에서 봉화와 횃불 만세 시위가 등장한 것은 3월 23일 밤 강내면 태성리에 있는 산 위였다. 이때 인근의 18개 마을과 옥산면·남이면 등지에서도 호응하여 수십 개소의 산 위에서 봉화와 횃불이 피어오르고 대한 독립 만세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청주와 조치원에 주둔하던 경찰과 군대를 출동시켜 수많은 인원을 체포하였으나 만세 시위는 이튿날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이 같은 봉화·횃불 만세 시위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는데, 멀리는 충청남도·경기도 일부에까지 파급되었다. 봉화 만세 시위를 창안하고 대규모의 연합 시위로 이끈 주동자 중 한 명은 강내면 태성리에 사는 조동식(趙東植)이었다. 조동식의 판결문을 보면 예로부터 국가에 변란이 있을 때 봉화를 올려 이를 주변에 알리고 경계한다는 예에 따라 산마루에서 횃불을 올리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고 하였다, 청주 봉화 만세 시위는 3월 23일부터 4월 7일까지 절정을 이루었다.

청주 만세 시위에서 규모가 크게 확대되면서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였던 시위는 3월 30일 미원리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였다. 청주 지역 만세 시위 중 최대 규모인 1,000여 명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 시위를 벌였는데, 일본 헌병은 태극기를 빼앗고 신경구(申敬求)를 비롯한 주동자 10여 명을 연행하였다. 이에 격분한 군중은 연행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헌병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부용면에서는 3월 30일 산 위에서 봉화가 오른 데 이어 3월 31일 부강역 앞에서 군중이 모여 만세 시위를 벌였다. 낭성면에서는 3월 31일 주민들이 낭성면사무소를 습격하였으며, 북일면에서는 3월 21일 천도교도들이 내수장터에서 시위를 벌였고, 4월 1일과 2일에는 한봉수의 주도로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북이면에서는 4월 1일 밤 신기리 주민들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고, 4월 6일 밤에는 문의면 인근의 산 위에서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횃불 시위를 벌이다가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의하여 강제 해산당하기도 하였다.

[청주지역 서훈된 독립운동가]

2023년 현재 정부로부터 3·1운동 계열로 공적을 인정받아 서훈을 받은 청주의 독립운동가는 40명이다. 그러나 여러 기록에서 보듯이 참여자는 수천 명에 이르렀다. 시위 참여자의 신분은 농민이 절대 다수이고 학생과 면서기 및 고용원 등도 참여하였다.

[특징]

청주 지역 만세 시위 중 봉화와 횃불 시위는 특징적 양상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3·1운동의 초기 단계를 주도한 이른바 민족 대표 중 손병희(孫秉熙)·권병덕(權秉悳)·신석구(申錫九)·신홍식(申洪植) 및 정춘수(鄭春洙)가 청주 출신이란 점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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