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4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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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白秀 |
영어공식명칭 | O Baeksu |
이칭/별칭 | 주보(周輪),창명(槍鳴)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미천리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한애라 |
[정의]
개항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에서 활동한 학자.
[가계]
오백수(吳白秀)[1876~1957]의 본관은 보성(寶城)이며, 자는 주보(周輪), 호는 창명(槍鳴)이다. 보성 오씨 족보에는 오한수(吳翰秀)로 등재되어 있다. 증조할아버지는 오형만(吳亨晩)이고, 할아버지는 오문흠(吳文欽)이다. 아버지는 오연영(吳淵英)이고, 어머니는 곽봉규(郭鳳圭)의 딸 현풍 곽씨(玄風 郭氏)이다. 부인은 박해정(朴海錠)의 딸 순천 박씨(順天 朴氏)이고, 아들은 오희룡(吳熙龍)·오희봉(吳熙鳳)·오희구(吳熙龜)이다.
[활동 사항]
오백수는 1876년 11월 3일 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노호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책을 가까이하며 학문에 뜻을 두었고, 최익현(崔益玄)[1833~1906]의 문하생이 되어 수학하였는데 학문과 언행이 뛰어났다. 1907년에 최익현이 사망하였다는 부음을 듣자 비분강개하여 통곡을 한 뒤 제문(祭文)을 지어 보내기도 하였다.
오백수는 1908년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문의시내1길 11-14[미천리 220-1]에 있는 문의향교(文義鄕校) 동재(東齋)의 유생들을 가르치는 동재선생이 되어 강학하였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뒤 향교가 문을 닫자 향리인 노호리에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오백수는 1957년 11월 5일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오백수의 저술로는 문집인 『창명집(槍鳴集)』 10권이 전한다.
[묘소]
오백수의 묘소는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노호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