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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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上黨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강민식 |
비정 지역 | 상당현 - 충청북도 청주시|괴산군 청천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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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고지명 |
관련 문헌 | 『삼국사기』|『고려사』|『세종실록』|『신증동국여지승람』 |
[정의]
삼국 시대 충청북도 청주시에 있었던 지방 행정 구역.
[명칭 유래]
1451년(문종 1) 간행한 『고려사(高麗史)』 권56에 청주목(淸州牧)이 ‘본백제상당현(本百濟上黨縣)’이며 신라 신문왕 초에 서원소경을 두었다고 하였다. 이후 1481년(성종 12) 간행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한 모든 지리지의 건치연혁(建置沿革)에 백제 상당현을 언급하였다. ‘상당(上黨)’은 고려 성종 때 청주의 별호로 사용된 이래 청주를 대표하는 지명으로 알려졌다. 상당산성(上黨山城)을 비롯하여, 청주 토성의 봉호에도 자주 보인다.
[형성 및 변천]
1451년 간행한 『고려사』에 처음 청주목이 백제 때의 상당현이라 한 이래 모든 지리지에서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백제 상당현 이후 685년(신문왕 5) 신라는 서원소경(西原小京)을 설치하였고, 경덕왕 때 서원경으로 고쳤다. 9세기에 이르러 서원부(西原府[部])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고려 때 금석문에도 나타난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인 940년(태조 23) 비로소 청주(淸州)라 하였다. 이후 조선 시대에는 읍호 강등에 따라 청주목이 여러 차례 서원현(西原縣)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상당현의 오늘날 행정 구역은 분명하지 않다. 상당현을 승계한 서원소경의 영역 또한 밝혀지지 않았지만 오늘날 문의면, 가덕면, 현도면을 제외한 청주시 일원과 괴산군 청천면 일대인 옛 청주목과 대체로 일치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백제 때 군현이 설치되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상당현은 고려 성종 때 별호 제정 이후 청주를 대표하는 지명으로 사용되었고, 청주 출신 유력 성씨들의 득세와 함께 봉호로 사용된 결과 조선 초 지리지에 채용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관련 기록]
상당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사』 지리지이다. 청주목은 본래 백제의 상당현이라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7, 잡지6, 지리4에는 백제 서원(西原)이 달리 비성(臂城), 자곡(子谷)이라 불리었으며, 『삼국사기』 권36, 잡지5, 지리3에는 신라 때의 서원경(西原京)은 685년(신문왕 5) 서원소경을 설치한 후 경덕왕 때 이름을 고친 것이고 지금의 청주라 하였다. 이후 『세종실록(世宗實錄)』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같은 내용이 보인다. 이미 『고려사』에 보이는 백제 상당현에 이어 940년(태조 23) 오늘날의 지명인 청주라 불리게 되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비성과 자곡을 낭비성(娘臂城)과 낭자곡(娘子谷)으로 고쳐 적었다. 상당은 청주의 별호로서, 첫 기록은 『고려사』 지리지의 백제 상당현과 숙종의 왕자 상당후(上黨侯) 필(佖), 상당군(上黨君) 백이정(白頤正)[1247~1323], 한공의(韓公義) 묘지명에 보이는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악(韓渥)[1274~1342]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