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8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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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德留里 |
영어공식명칭 | Deogyu-ri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덕유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정인 |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덕유리(德留里)’라는 명칭은 1760년(영조 36) 이후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처음 보인다. 1914년 간행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서는 웅곡(熊谷)이라 기록되어 있어 ‘덕유’란 뜻은 곰실마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음의 변천과 유래는 알기 힘들다. 골짜기에 울음소리가 나므로 덕음, 덕우리 또는 덕유리라 하였다고도 하고, 역이 있는 곳이라 하여 ‘역유리’가 변화되었다고도 하는데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다.
[형성 및 변천]
본래 조선 후기 문의군(文義郡) 읍내면(邑內面) 지역으로 조선 시대 역(驛)이 있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덕유리와 일도면 광원리(光院里), 남면 웅곡리(熊谷里)를 병합하여 충청북도 청주군 용흥면 덕유리로 개설되었다. 1930년 용흥면과 양성면을 합하여 문의면이 되면서 충청북도 청주군 문의면 덕유리로 개편되었다. 1946년 6월 1일 청주읍이 청주부로 승격되는 동시에 청주군의 나머지 지역이 청원군으로 변경되면서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덕유리로 개편되었다. 2014년 7월 1일 청원군과 청주시가 통합되면서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덕유리가 되었다. 1980년 대청댐 준공에 따라 마을 전체가 모두 수몰되어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자연환경]
대부분의 면적이 산지이다. 서쪽 구룡산은 구봉산이라고도 하며 정상부는 조망이 탁월한 지세를 보인다. 능선은 비교적 가파르게 내려가 대청호와 이어진다. 서쪽의 구룡산과 동쪽의 월굴봉 아래 형성된 소하천 주변의 평탄지에 마을들이 있었다. 문의면 내에서도 평탄지가 많은 동네여서 농경이 발달하고 인구가 많던 곳이었으나 마을들이 산덕리, 구룡리에 비하여 저지대에 위치하여 수몰을 피할 수 없었다.
[현황]
2023년 현재 덕유리의 면적은 5.4㎢이며, 수몰 지역으로 아무도 살지 않는다. 덕유리는 문의면의 중앙부에 있으며, 동쪽으로 산덕리, 서쪽으로는 서원구 현도면 하석리, 남쪽으로 신대리, 북쪽으로 품곡리와 접하고 있다. 수몰 전 자연 마을로는 내덕[안덕유], 외덕[배갈덕유], 신촌[새말], 광원, 곰실[웅곡]이 있었다. 조선 시대 외덕에는 역이 있어 ‘역촌(驛村)’이라 하였다고 하며, 광원리에는 관리들의 숙식을 제공하던 원(院)이 있었다. 이러한 교통의 요지로서 덕유리는 조선 시대 문의면에서 손꼽히던 부촌 지역이었다. 황경재[서울 가는 길가에 있는 고개]에 옛 마을이 있었다고 하며 조선 말 동학농민운동으로 인하여 마을 전체가 소실되어 곰실의 위쪽 새말에 다시 부락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수몰 전에는 문의에서 신탄진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번성하였다. 마을 입구 양옆에 오래된 돌탑인 남신탑과 여신탑이 있었으며 오래된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수십 주 있었다고 한다. 1980년 모두 수몰되고 지금은 볼 수 없다.
덕유리의 문화유산으로는 서쪽 구룡산 정상부 일대에 구룡산성(九龍山城)[청주시 향토유적 제13호]이 있는데, 구룡산성은 삼국 시대 백제와 신라가 치열하게 대립한 곳이라 한다. 구룡산 남쪽 현암사에는 오래된 부도(浮屠)가 있다. 이 밖에 현재 수몰된 내덕마을에는 1977년 문화재관리국에서 발굴 조사한 김생사지(金生寺址)가 있으나 지금은 볼 수 없다. 관광 자원으로 구룡산 아래로 대청호반로가 지나고 남쪽 끝에 튀어나온 지점에는 대청댐전망대[현암휴게소]가 자리하고 있다. 구룡산 정상에는 용의 승천을 나타내는 조형물과 장승이 설치되어 있다. 구룡산 남쪽 자락에는 현암사(懸巖寺)가 있는데, 현암사는 새해 해돋이 명소로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