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08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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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彌勒信仰 |
영어공식명칭 | Maitreya Worship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영진,김해인 |
[정의]
충청북도 청주 지역에서 전하여 오는 미륵불에 대한 신앙.
[개설]
미륵은 미래의 부처로서,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다음에 사바세계에 나타나서 중생을 구원한다는 보살이다. 미륵 신앙은 인도에서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 사이에 발생하였는데, 석가모니불이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을 남김없이 구제한다는 대승적 자비 사상을 근거로 출현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마을마다 돌부처로 미륵을 새길 만큼 미륵 신앙이 민중 깊숙이 뿌리내렸는데, 왜냐하면 미륵 신앙이 새로운 세상을 약속하는 혁명 사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즉, 민중은 미륵이 자신들을 구제하고 지상천국으로 이끈다는 믿음과 희망에서 미륵을 신봉하므로, 후삼국 시대 말기나 고려 시대의 무신 집권기·몽골 침략기, 조선 시대의 임진왜란·병자호란 등 역사상 사회의 혼란기나 전환기에는 새로운 세상을 요구하는 민중의 열망에 부응하여 미륵 신앙이 크게 유행하였다. 근대의 신흥 종교도 미륵 신앙을 바탕에 두고 교주가 미륵을 자처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정치적 야심가들이 새로운 명분을 내세우거나 민중을 끌어모으는 수단으로 미륵 신앙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민속에서의 미륵 신앙]
충청북도 청주시를 비롯한 우리나라 전역에서 나타나는 미륵 신앙은 민속의 측면에서 볼 때, 바위를 신격화하여 숭배하던 암석 신앙의 한 유형인 선돌 신앙이 불교가 전래된 뒤에 석불 신앙으로 옮겨지고, 다시 석불 신앙이 미륵 신앙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이는 민간에서 절이 아닌 곳에 있는 석불을 형체와 관계없이 거의 ‘미륵’으로 부를 뿐만 아니라 돌장승과 선돌까지도 ‘미륵’이라 부르는 것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선돌 신앙이 석불 신앙으로 쉽게 바뀔 수 있었던 것은 선돌이나 석불이 모두 암석이고 모양도 입체적이라는 공통점 때문이었다. 더욱이 조선 시대의 불교 배척 정책으로 많은 절이 폐허가 되고 산기슭이나 들판에 방치된 돌부처에 접근하기 쉬워지면서, 자연적인 선돌보다 종교적으로 가공된 석불에서 더 깊은 신앙심을 느끼고 또 그 신앙심을 더욱 구체화하여 자비심이 많은 ‘미륵’으로 부르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처럼 미륵 신앙은 불교라는 종교와 민속이 합쳐진 형태로 발전하여 더욱 적극적인 신앙으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청주 지역 미륵 신앙의 유물유적]
청주 지역에서 미륵 신앙의 모습을 보여 주는 가장 오래된 유물은 현재 청주시 상당구 명암로 143[명암동 87]의 국립청주박물관에서 보관하는 보물 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彌勒菩薩半跏思惟碑像)이다. 그 생김새가 탑비(塔碑)를 닮았다 하여 비상(碑像)이라 불린다. 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은 삼국 시대에 유행한 미륵 신앙을 배경으로 크게 발달한 반가사유상 양식의 귀중한 유품이다. 만들어진 연대는 조각 솜씨로 미루어 보아 충청남도 연기군 비암사(碑岩寺)에서 함께 발견된 국보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과 같은 673년 즈음으로 추정되며, 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과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은 백제의 석조 미술 수준을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은 아래쪽의 대좌, 중앙의 사면석, 위쪽의 덮개돌이 모두 하나의 돌로 ‘티(T)’ 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비상의 정면에는 왼발을 내리고 오른발을 왼쪽 다리에 올린 반가상이 크게 새겨져 있는데, 오른손을 들어 뺨에 대고 생각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화려한 관(冠)과 목걸이, 구슬 장식을 갖추고 있다. 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의 양 측면에는 두 손에 보주를 들고 정면을 향한 보살 입상이 새겨져 있는데, 반가상을 본존으로 삼아서 3존 형식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뒷면에는 보탑(寶塔)을 크게 새겼는데, 뒷면의 보탑은 정면의 반가상이 미륵보살을 형상화한 것임을 추측하는 근거가 된다.
서원구 사직동에 있었던 고려 시대 사찰 사뇌사(思惱寺)[‘사내사(思內寺)’라고도 한다]는 미륵불을 모셨던 절로 여겨진다. 절터에서 많은 금속공예품이 출토되었는데, ‘사내사(思內寺) 미륵전(彌勒殿)’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금속공예품을 확인할 수 있어 고려 시대 청주 사뇌사에 미륵불이 모셔진 전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사뇌사 터에서 100m 정도 떨어진 용화사(龍華寺)에도 미륵으로 여겨지는 거대 불상이 있어, 이러한 유물들을 통하여 고려 시대 청주 지역에도 미륵 신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상당구 가덕면 상야1길 472-35[상야리 40-1]에 있는 황금미륵사(黃金彌勒寺)는 대웅전 안에 걸린 목재 현판의 사적문에 따르면 고려 광종 때[949~975년] 미륵 석불을 조성하였다는 구전이 있다고 하는데, 자세한 유래와 연혁은 알 수 없다. 절은 오랫동안 폐사로 있다가 1960년에 법당을 짓고 불사를 다시 일으켰다. 법당에는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불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심하게 손상되어 자세한 형상은 파악하기 어려우나, 제주도의 돌하르방과 비슷한 모습이며, 조선 시대에 조성된 미륵불로 추정된다. 이 미륵불을 통하여 민간신앙화된 미륵 신앙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서원구 죽림동에 있었다고 전하는 미륵불[속칭 돌장승]은 주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대상이었다. 아들이 없는 집에서는 아들을 빌고 환자가 있는 집에서 병이 낫기를 빌면서, 미륵 앞에 촛불을 켜 놓고 정화수나 간단한 제물을 차려 놓고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치성은 적으면 3일이고 많으면 100일을 정성껏 하였는데, 부정을 막고자 미륵 주변에 황토를 뿌리거나 미륵을 왼새끼로 감기도 하였고, 특히 수명장수를 빌 때는 명주실 타래를 감기도 하였다고 한다. 죽림동 미륵은 도시화 과정에서 없어져 오늘날에는 소재를 알 수 없다.
상당구 용정동 532-102에 있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 청주 순치명 석조여래입상(淸州 順治銘 石造如來立像)은 마을 어귀에 세워진 마을 수호신 장승이자 미륵불이라는 복합적인 성격을 띠는 것으로 보인다. 미륵불 복부의 하단에는 “순치구년십일월십육일입(順治九年十一月十六日立)"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1652년(효종 3)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